[칼럼] 좌훈정 전 대한의사협회 감사

 

지난 25일 국회법 개정안의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대부분의 국회 일정이 중단된 상황에서도 보건복지위는 메르스 관련 법안들을 일사천리로 처리함으로써 간만에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 겹 벗겨보면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법안 통과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법안의 주요 골자는 이번에 문제가 된 감염 환자 정보 공개 의무화를 비롯하여 의료기관 및 국가·지자체간 정보 공유시스템 구축, 감염병관리사업 지원기구 설치 의무화, 역학조사관 인력 양성 등이다. 그러나 이번 메르스 사태로 피해를 본 병의원이나 피해지역 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예산문제 등을 이유로 추후 재논의하기로 했다. 또한 감염병 관련 전문병원·연구병원의 설립문제도 제외되었다.

이에 메르스 진료현장에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들은 황당해 하고 있다.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제도 마련도 중요하지만 당장 피해를 보고 있는 병의원이나 의료인에 대한 지원이 빠져서 알맹이 없는 법안이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보건복지위 법안심사소위에 참석한 기획재정부는 물론, 보건복지부까지도 메르스로 인한 간접피해는 보상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해 의료인들의 상처를 더욱 헤집어 놓았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의료계에는 메르스로 인해 의료인이 격리되거나 병의원이 문을 닫음으로써 생기는 피해 외에도, 각종 직간접적 여파로 인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의료인들은 정부의 약속만 믿고 진료 현장에서 희생해왔다. 그러나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정부나 국회는 피해보상은 뒷전이고 우선 손쉬운 규제만 늘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기관이나 의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장의 피해뿐만이 아니다. 감염병 방역을 위한 각종 법안과 규제들, 예컨대 시설과 인력의 기준 강화 등이 가뜩이나 어려운 병의원들을 파산으로 내몰 것이라는 우려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의 시설 투자와 인력 배치는 현재의 저수가에 맞춰져있다. 즉 애초부터 정부가 설계한 ‘저부담 저급여’ 의료보험의 환경에 따른 열악한 조건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저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규제만 들입다 강화한다면, 의료기관들의 경영난은 가중되고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의 근간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이미 6년 전 신종플루 사태에서 정부가 의사들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이 대부분 부도수표가 되어 날아갔다는 것을 학습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은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또 토사구팽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자조한다. 그 때도 전국적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내고 의료진들이 죽을 고생을 했지만, 지금껏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당시 의사들을 더욱 허탈하게 만든 것은 공무원들의 포상 잔치였다. 그렇게 상이나 타면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무사안일하게 대처한 결과가 지금 메르스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그렇게 욕먹으며 고생하고도 피해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의료인들이 불쌍하고, 정부만 믿다가 죽은 환자는 더 불쌍하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