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시범적인 대상으로 경성의전 교수가 되어 조선학생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고 백
인제 박사의 수제자는 고 장기려 박사가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대전도립병원 외과과장으로
파견을 가라는 스승의 지시를 거절하고 가난한 조선인환자가 많은 평양연합병원(기흘병원,
The Hall Memorial Hospital)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12월 장남 가용(전 서울의대 해부학교수)과 함께 탈북해 스승의 대학인
인제대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나의 원장 재임시절 석좌교수와 명예원장으로 추대했
다.
 
장 박사와의 첫 만남은 1932년 이른 봄 한강 중간 둔치의 모래밭이었다. 경성의전 기독학생
회가 주최한 신입생 환영회에서 서로 인사를 한 것이다. 이 모임에는 780여명이란 엄청난 인
원의 조선인학생이 모였다. 이 자리는 원래 부속병원이던 총독부병원이 경성제국대학에 빼앗
기고 소격동에 새 부속병원이 생겨 3∼4학년은 그곳에서 임상실습을 받게 됨에 따라 고급반
학형들을 만나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마련된 것이었다. 예과 1∼2학년들은 옛 교사가 있는
연건동에서 강의와 실습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3∼4학년은 군사훈련을 받는 교련시간에
만 연건동으로 와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기 경성의전에 기독학생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사실이다. 이 학생회는 일본학
생들이 만든 불교학생회에 대응하기 위해 사상적으로 앞선 한국인 학생들이 조직한 것이다.
기독학생회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참석하기도 했지만 분란을 일으키려고 의도적으로 참석하
는 학생은 없었다.
 
또 시대적으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표면적인 알력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
다.
 
장기려 학형과 친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해방 이전에 교회에 나가면서 부터이다.
 
의전에 입학한 후 이북의 고향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
는 남대문교회에 나가다가 설교가 색다르다는 종로의 중앙교회, 또 한때는 찬양대가 유명하다
는 승동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기도 했다.
 
신앙심이 깊어진 것은 의전 졸업후 전염병 격리병원이던 순화병원에서 발진티푸스에 이환돼
고생할 때부터였다.
 
결혼 후 화동에 살고 있었지만 교회는 장기려 학형이 나가는 명륜동 2가의 영선동 교회로 갔
다. 어느새 부인들끼리는 의자매를 맺고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었다.
 
장형은 이 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와 찬양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목사가 고령이라 결원목사
역할까지 하며 이 교회를 꾸려가는 실정이었다. 성가대는 장형의 요청으로 같은 동네에 사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생려씨가 지휘를 하고 그 부인이 피아노 반주를 했다. 장형은 노래솜씨가
좋아 테너를 맡고 소프라노는 장형부인과 나의 아내, 그리고 여자의전 학생들이 참여했다.

베이스는 성량이 좋고 당시 작곡가로 이름나 있던 조활용씨가 먼 거리의 청량리에서부터 나
와 담당했다. 교회의 규모는 작지만 성가대는 이름이 나 있어서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는 어
김없이 방송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기도 했다.
 
우리가 즐겨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안병원(安丙元)씨는?장기려 님이 가르치
던 숭이동 어린이 주일학교 학생이었다.
 
장형은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가 복음진료소를 열어 빈민구호진료에 전력을 다했다.
이 진료소는 후일 고신재단에 예속, 고신의과대학으로 발전됐다.
 
그러나 장형의 빈민구호치료신념은 그치지 않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세워 그들의 진료
비 걱정을 덜어주었다. 이 조합은 그후 장형의 건강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하는 생
각을 해본다.
 
후배들은 그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젊어지는 기적 같은 현상이 나타나
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특히 이 빈민구료 문제가 없었던들 자신의 은사
인 백인제 교수의 인제대학을 전담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든 그는 고신의료원을 설립하고 간호학교도 신설, 고신대학을 세워 부산의 저소득층 진료
에 전념했다. 장형은 치료비가 없어 의사의 진찰조차 받지 못하고 고생하는 환자가 가엽고 딱
하다고 생각, 의학도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장형은 1909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태어나 송도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자신의 전 인격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의 뜻대로 살겠
다고 결심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모든 성
실 선행에 대한 최고의 표창을 받았다. 국민훈장 동백장(76), 대한적십자상 인도상(78), 라
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79. 인도), 부산시문화상(80), 국제라이온즈클럽 인도상(81) 등
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그가 받은 막사이사이상의 부상 2만달러는 전액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에 기증했다.
 
그는 값있고 뜻있고 보람찬 인간으로서의 삶을 훌륭히 마치고 1995년 12월 25일 이른 새벽
87세를 일기로 서울백병원 중환자실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장형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인술적인 행동을 실제로 후배들에게 보이려 했다. 70세 이
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전 진료가 끝나면 인제대학병원에 나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특강,
증례토의 등 전공의 및 학생들과 함께 의학교육에 매진함으로써 후학들이 더욱 숭상하게 됐
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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