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대 정년퇴임(1978년 8월)을 몇 개월 앞둔 시기에 서울백병원 백낙조 재단이사장이
만나자고 요청해왔다.
 
백이사장은 필자에게 가톨릭의대를 정년퇴임하고 79년 4월에 개교하는 인제의대 초대학장
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이사회에서 학장선임을 두고 신중히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나를 가장 적임자라고 천거하는 이사들이 많아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이라고 했다.
 
또 내가 고 백인제 교수님을 존경하고 따랐던 만큼 그분의 숙원이던 의과대학이 설립되었으
니 학장직을 맡아주어야겠다는 명령 같은 요구를 해오기에 일단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 시기
정년 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구상을 골몰히 하고 있던 때였지만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었고 나로서는 당장 결정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백이사장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족들과 상의 후 적당한 시기에 다시 보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백이
사장의 제안은 그간의 갈등을 말끔히 사라지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일선에서 물러
나 바쁘지 않고, 책임도 그리 많지 않은 한직이라면 최상이라고 소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설 의과대학의 학장이라는 중책을 나에게 맡긴다는 사실이 나를 인정한다는 뜻이라
고 생각하니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 몰려왔다.
 
인생을 정리하고 일선에서 물러나려는 나에게는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벅차올랐다. 특히 존경하던 고 백인제 교수님이 한국최초의 공
익재단인 백재단을 설립하시면서 소원하셨던 의과대학 설립이 이루어지는데 기여하게 된다
는 점이 결정을 머뭇거리지 않게 했다. 순간적으로 그간의 복잡하던 마음을 말끔히 정리하고
다음날 백 이사장에게 요청을 수용하며 감사하다는 대답을 했다.
 
인제대학은 백인제 교수님의 장남 백낙조 님과 조카 백낙환 님이 고인의 뜻을 기려 미국 메이
요클리닉보다 더 훌륭한 기관을 세우기로 합심하면서 설립작업이 시작됐다.
 
오늘의 종합대학은 당초 의과대학으로 한정되기를 바라던 백낙조 님의 희망과 달리 백낙환 님
의 불굴의 정신과 추진력으로부터 비롯, 결실을 맺은 것이다.
 
가톨릭의대 정년퇴임식에는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섭섭하거나 다소 초라하게 보였을 퇴임
식이지만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지 참석자들의 이상하다는 표정을 간간히 읽을 수 있었
다. 하지만 가깝게 지낸 친지들은

이미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퇴임후 뒷마무리와 주변정리를 하느라
바쁜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음해(79년) 2월 말경 인제대학의 신축현장인 부산시 진구 개금동을 찾아갔다. 3일 후면 개
학을 하는 학교에 강당도 없고 많은 인원을 수용할 넓은 장소가 없었다. 한마디로 막막한 실정
이었다.
 
당시 건축 중이던 10층 건물은 병원으로서 이 건물 꼭대기 10층을 강의실로 사용해야 하지
만 엘리베이터도 가설되지 않고 화장실조차 공사가 끝나지 않아 소변은 모아서 버리는 식으
로 임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 입학식을 할 것이며 학생강의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3월 2일 오전 10시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병원입구의 길은 깨끗하게 정
리가 됐고 식장인 1층 환자대기실로 들어가는 계단위에는 카펫이 깔렸다. 식장의 주위 벽과
천정은 흰색으로 도색, 전기광선으로 환하게 비춰져 그럴 듯 했다. 식장은 엄숙한 분위기였
다. 3일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긴급으로 조성한 것이었지만 하객들은 이해를 하는 것인지
만족해하는 표정들이어서 안심이 됐다.
 
그러나 10층으로 걸어 올라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할 것인지 눈앞이 까마득했
다. 교직원들과 상견례를 한 후 당분간 불편함을 최대한 참고 견뎌줄 것을 당부했다. 이 반응
은 헤어지기 직전 학생들과 한 `인제만세` 삼창의 소리가 작지 않아 은근히 안심이 됐다.
 
학생들의 불만이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교수들의 강의 태도 마저 좋지 않다면 문
제가 커질 것이라고 우려, 절대로 지각을 하거나 결강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결강이 부득
이 할 경우는 반드시 보강(또는 대강)하도록 지침을 내려 단단히 당부했다.
 
약간의 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달가량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학생대표라
하여 학생 세명이 점심시간에 학장실로 찾아왔다. 그들은 강의시간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이
있음을 털어놓았다.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우리들이 받는 수업은 의학과 관계되는 과목이나 제목은 한가지도 없
고 고등학교에서 신물나게 배운 화학, 생물, 수학, 물리 등이 고작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강
의도 이해를 잘 하지 못할 만큼 고급이고 재미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과대학의 목표며
본질입니까"며 따지고 항의했다.
 
할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자신도 우리나라 의예과교육이 개선
돼야 한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참이어서 그들의 항의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당장 교수회의에 이 문제를 논의해서 답을 주겠다고 했다. 또 당시
의 국내 현실상 별다른 의예과 교육내용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또 그들에게
이러한 현실을 지적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날 오후 긴급히 열린 교수회의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이 전폭 수용되고 그 다음주부터 강의
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의학특강시간을 1주일에 한시간씩 늘리고 그때 그때 보도되는 의학 토픽을 해당과 교수
들이 쉽게, 기초의학적인 견해를 곁들여 해설하고 학생들과 대담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빈혈이 주제가 되면 환자의 혈액표본을 제시하고 왜 빈혈을 일으키게 됐는지 원인
들을 열거했다. 또 빈혈과 관계되는 조혈장애와 그로 인한 대사장애 등을 설명하는 형식의 강
의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이 있었다.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기분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이러한 특강은 3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교재가 없어 체계적이지 못하고 일관성이 결여돼 효과
적인 교육이 어려웠다. 그간 특강을 가장 많이 한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의학교육 개
론`이란 책자를 발행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시작한 강의는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찾았
다. 어려운 의학교육이지만 본질을 깨닫게 해주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도록 해준 것이다.
 
신설대학으로 오길 잘했다는 보람이 충만했다.
 
재단은 학장임기 4년 후에도 자문교수로 남아 80세까지 근무하도록 특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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