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숨기는 밴딩...본격 협상에 앞서 진부터 빠진 모습

매년 같은 방식의 숫자전쟁에 공급자단체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있다. 비합리적인 방식을 끌고가면서 소모적인 언쟁만 이어진다는 비판이다.

지난 13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6개 공급자단체장과의 간담회를 시작으로, 내년도 진료비 인상률을 둘러싸고 공단과 공급자단체간 긴 샅바싸움을 치르고 있다.
 

 

특히 올해는 유난히 공급자단체 협상단들의 회의감이 고조돼 있고, 단순히 인상률 조정이 아닌 수가협상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있다.

대한약사회는 협상 시작 전부터 현재의 수가협상 틀에 대해 지적해왔다. 이영민 부회장(수가협상단장)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십수년간 수가협상에 임해왔는데, 이는 시험범위도 알려주지 않을 채 시험만 보라고 하는 꼴"이라며 "얼마의 재정을 풀지를 모르는 상황 속에서, 0.1%, 0.2%의 수치로 피튀기는 경쟁을 해야 하는 수가협상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공단은 밴딩폭을 숨기는 것에 대해 '전략'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겠다는 뜻으로, 이는 협상이 아닌 '갑의 횡포'에 불과하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이 부회장은 "밴딩폭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수백번 만난다고 해도 모두 불필요한 일이다. 이제는 무의미한 말 장난, 수치 게임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논쟁의 장으로 거듭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대한치과의사협회 마경화 부회장(수가협상단장)도 같은 입장이다. 밴딩이 나오지 않을 상태에서 공단과의 갑론을박은 비논리적인 말싸움이라는 지적을 제기했다.

마 부회장은 "2주가량 공단과 서로 수치(인상률)를 주고 받는 과정이 허무하다"며 "아무리 인상률을 잘 받아도, 결국 얼마만큼의 재정을 풀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소모전에 불과하다.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1~2차 협상에서는 알려주지 않더라도, 도장 찍기 전날이나 3~4차 협상쯤에는 미리 언질을 줘서 협상단이 단체장과 협의해볼 시간은 줘야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미리 밴딩폭을 알려주면 신뢰에 근거해 협상을 더 잘 이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전에 의견을 조정해 결렬 가능성도 낮아질 수 있다고 예견했다.

흑자에 사활걸었으나, 밴딩폭 받고 나니 '실망'

게다가 공급자단체들은 건보 재정 흑자에 큰 기대 걸었음에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추가소요 재정(밴딩)이 결정돼 실망감이 역력한 상태다.

재정소위에서는 앞서 부대조건으로 목표관리제를 중점적으로 다룬 데 이어, 이날 열린 소위에서는 밴딩폭을 구체화했다. 사상 최대 흑자분에 따라 7000억원대 초중반선으로 예상됐던 것과 달리 지난해와 비슷한 6000억원대 후반선에서 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 약사회 이영민 부회장.

약사회 이영민 부회장(수가협상단장)은 "우회적으로 밴딩을 물어봤는데, 공단에서 어렵다고 얘기했다"며 "공급자들이 어려울 때 기여한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약사회는 밴드를 타이트하게 정한 만큼, 3차협상부터는 다른 유형과 차별화된 부분들을 제시하면서 인상률을 끌어올리겠다는 입장이다.

이 부회장은 "3차부터 기술적으로 상호 인상률을 교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카드 수수료나 임대료, 인건비 등 다른 유형보다 더 부담이 큰 부분을 높은 인상률을 받기 위한 핵심 근거로 끌고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병원협회 역시 공단측으로부터 적은 밴딩폭에 대해 전해들었음을 밝히면서, 이계융 부회장(수가협상단장)은 "올해 수가협상은 만만찮을 것 같다.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의협 역시 밴딩폭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협 김숙희 부회장(수가협상단장) 역시 "이번에는 워낙 건보재정 흑자분이 컸다. 게다가 국고 미지원금까지 합하면 거의 20조원에 달한다"면서 "때문에 밴드를 넉넉히 제시해 그간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줄 알았지만, 오늘 들어보니 그렇지 않은 수치"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또한 "공단 측에서 밴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비밀을 유지하는 점도 불만"이라며 "3차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을까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의협은 이번 협상 결과를 낙관하고 있다. 적은 밴딩폭이지만 다른 유형에 비해 어렵다보니 유형별로 쪼갰을 때 '우위'가 될 것이란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 김 부회장은 "1차의료기관이 어려운 상황을 이미 공단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며 작년 한 해 뿐만 아니라 십수년째 저수가로 인해 어려웠던 부분과 동네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오고 봉사한 부분에 대해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고 읍소했다.

사상 최대 누적 흑자 분이 밴딩에 반영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 건보공단은 "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에 드는 비용에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향후 더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질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주변에 불과한 부대조건에 열올리는 공단·가입자들

또 지나치게 부대조건에 열을 올리는 건보공단 협상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간 부대조건(부대합의)은 3~4차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논의됐으나, 올해는 2차부터 전체 유형별 단체에 뿌려진 것.

발단은 재정소위에서 시작됐다. 공단에 환산지수와 진료량 변화를 연계시키는 '목표관리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주문했기 때문. 사상 최대의 인상률을 주더라도 해당 부대조건을 받아내야 한다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공단은 협상 내내 부대조건 설명에 열을 올렸다. 하루이틀 안에 결정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임을 고려해 당장의 결정은 독촉하지 않았으나, 가입자들의 이목이 쏠려 있기에 어느 한 단체라도 이를 받아드렸으면 하는 모양새가 역력했다.

역시나 공급자단체들은 확답을 피했고, 수치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정치적인 부분을 꺼내오는 것에 대한 반감도 드러냈다.

먼저 의협에서는 부대조건을 제시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고 꼬집었다. 김숙희 부회장은 "그냥 제도에 대한 설명만 있었을 뿐, 이를 어느 정도 선에서 운영할지, 또 해당 부대조건을 받으면 얼마만큼의 인상률을 줄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 역시 이를 고민하거나 결정할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또 김 부회장은 다른 협상단들과 마찬가지로 "목표관리제는 부대조건이 아닌 보건의료제도의 변경일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하루이틀만에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며 즉각적인 확답을 피했다.

병협 이계융 부회장은 추후 이를 받아드릴 가능성에 대해 "인상률이 50% 가까이 되지 않는다면, 받기는 어려운 정책"이라며 "간단치 않은 문제"라도 대답을 회피했다.

본 협상도 들어가기 전에 부대조건 얘기가 나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며, "옳다그르다는 추후 협상을 마치고 판단할 문제"라고 했다.

약사회도 역시 언짢다는듯 "이번에도 공단이 재정을 잘 관리하자는 취지로 목표관리제를 제안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 며칠안에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전반적인 공단의 상황 설명만 들었을 뿐, 답변은 내놓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한의협은 "회원들의 정서가 상당히 부정적인데다가 총액계약과 그 원리가 같아 협회 측에서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선을 그었다.

반면 치협은 다소 상황이 다르다. 진료비 증감율이 워낙 들쑥날쑥해 오히려 목표관리제를 시행할 경우 공단이 더 불리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

마경화 부회장은 "회원들의 반대는 뿐만 아니라 치과 의료기관의 진료비 증감이 워낙 오르락내리락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며 "공단에서도 선뜻 제안하지 않는 것은 향후 진료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일 자정 종료, 누가 울고 웃나?

협상은 오는 2일 자정에 완료돼 3일에 내년도 진료비 증가율이 공개되고, 이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통해 의결, 확정된다.

의협에서는 다소 높은 인상률을 예견하고 있다. 워낙 낮은 진료비 증가율을 보였고, 높은 폐업률, 1차의료붕괴 위험 등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

 

하지만 병협 측에서는 그간 의협이 계속 높은 증가율을 받고 병원계가 낮은 증가율을 받으면서, 종별 가산을 더하더라도 전체 지급되는 진료비량은 의원에서 더 커지는 '역전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분위기다.

게다가 병협은 그간 두 자릿수의 진료비 증가율을 보였던 것과 달리 지난해는 대폭 떨어지면서 올해는 1%대 인상률을 탈피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한편 건정심행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해는 치과의사협회와 한의사협회가 건보공단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서 결국 건정심행에 올라 패널티를 받게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올해 이들 단체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와 '가게 되면 갈 수도 있다'는 반응으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한의협 김태호 기획이사는 "협상이 결렬되면 공급자가 그 책임을 지게 되는 구조다. 공급자 측 입장에서는 불합리하지만 건정심을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입장"이라며 "이번에는 최대한 한방 의료기관의 통계적 오류, 카드 수수료, 급여 보장 미비, 높은 폐업률 등 여러 부분을 근거로 원하는 인상률을 받기 위해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단체들도 건정심은 최대한 피해보자는 분위기다. 의협 김숙희 부회장은 "일단 현재 제도 자체상 건정심에 가면 공급자 측이 불리해진다"며 "최대한 설득과 협상을 통해 원하는 수치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협상 베테랑으로 손꼽히는 치협 마경화 부회장은 "지난해 우리는 2% 후반대를 외쳤으나, 공단은 2.2%를 계속 주장했다. 막판까지 가면서 결국 우리는 2.4%만 맞춰달라고 했다. 15억원에 불과하다"며 "끝내 이를 받지 않아 건정심에 갔고 2.2%를 받게 된 것"이라고 정황을 설명했다.

불합리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대한 양보한 선을 공단에서 거부한다면 건정심을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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