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이 된 후 많은 사건을 겪었다. 의료사고 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갈등의 돌출로 인한 사건
도 있었다.
 
그중 윤덕선 의무원장이 성모병원을 떠난 일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원인을 자세히 알 수 없으
나 의료원장과의 금전 사용처에 관한 의견이 엇갈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일로 인해 윤 의무원장은 후배인 임상과장 10여명과 함께 성모병원을 떠나 길 건너편에서
필동성심병원을 개원했다. 임상교수들의 대거이동에 경악한 성모병원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원장인 나로서는 우선 자리가 빈 과장 겸 주임교수들의 확충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윤 의무원장이 떠나면서 외과 과장직을 맡게 된 김희규 교수와 상의를 했다. 내과와 외과가 주
축이 되어 난국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각 과의 추가이탈을 막기 위해 움직임
이 감지된 경우 적극 만류하는 등 단속을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덕분에 추가로 자리를 옮긴 경
우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도 있었다. 과장들의 대거 이동으로 외래환자는 물론 입원환자까지 날
이 갈수록 줄어들어 병원경영이 어려워졌다. 외과 김 교수와 숙의를 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생각해오던 계획을 김 교수에게 제시하고 상의를 했다. 이때가 기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 과의 교수들도 호의적이어서 다행스러웠다.
 
부과장급의 젊은 교수들에게 과장을 맡기자는 계획이었다.
 
내과는 민병석 교수, 외과는 이용각 교수에게 맡기자고 했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귀국, 그간 각과의 주역을 담당해온 만큼 과장을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됐
다. 특히 민 교수와 이 교수는 신장을 전공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신장
이식을 시도한다는 계획을 염두에 두었다. 김 교수의 의견도 같다고 확인한 후 민·이 두 교수
와 함께 자리를 가졌다. 우리 둘의 얘기를 들은 그들은 한사코 사양을 했다. 막강한 선배교수
들이 있는데 어떻게 과장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옛 사고에서 깨어나야 하며 과, 나아가 병원과 대학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심사숙
고한 것이라며 선배의 의도를 이해해주기를 권유했다. 결국 그들은 선배의 의견을 받아들였
다.
 
내·외과가 안정을 찾자 우리는 신장이식이란 거사계획을 추진했다. 우선 민 교수와 교분을 갖
고 미국에서 신장이식을 대기하고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로 했다. 미국 이민자인 환자 정
○○씨는 말기신부전증으로 시카고 마이클리스 재향군인병원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를 불러
성모병원에서 이식수술을 하자는 계획이었다. 대 모험이었다.
 
신기능에 조예가 깊고 내분비대사에 흥미를 가진 민교수와 미국 혈관외과계의 대가인 드베키
교수 밑에서 5년간 현장 수련을 받은 이교수가 어우러지면 못할 것도 없다는 용기를 가졌다.
 
국내 처음 실시하는 장기이식 수술인 만큼 우리는 내·외과와 비뇨기과, 마취과, 정신과, 병리
과, 미생물면역과의 인력을 선정, 이식팀을 짜고 환자가 귀국하기 까지 매일 도상연습을 하는
등 최고, 최상의 예비수술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환자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69년 3월25일 토요일 오후. 신장 기증자인 그의 어머니와 병
원에 후송되자마자 곧바로 시작한 검사에서 나타난 임상소견은 최악이었다. 따라서 이식팀은
환자의 신장을 적출하지 않고 먼저 환자 어머니의 콩팥을 떼 내어 아들의 우측하복부 혈관에
문합 부착시키는 응급수술만을 실시했다.
 
18분의 짧은 수술이었지만 그간 연마해온 기술을 모두 쏟았다. 이식팀은 물론 병원전체 직원
들이 수술결과를 기다리며 긴장돼 있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도 가시지 않
았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우리의 노력과 공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한시간 가량 지났
을 즈음 오줌이 힘차게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얼싸안고 환호를 하는 등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환자의 배뇨는 하루 동안 32,000㏄나 됐다. 30병의 생리식염수를 주
입, 신진대사를 도왔다.
 
이틀 후 시들어빠진 환자 자신의 신장이 제거됐다. 대성공이었다.
 
이 환자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 3개월 후 퇴원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아들 둘을 낳고 잘
살았지만 5년 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수술 1주일만에 나온 조직적합성과 면역반응검사결과가 최적이었음을 확인했다. 당
시 이식팀의 노고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내 첫 신장이식을 성공시켜 우리나라 의학의 신기원을 이루게 한 이 팀의 주역중의 한사람
인 이용각 박사는 1945년 경의전을 졸업하고 3년간 기초의학 중 면역학교실에서 연수를 하
다가 6·25가 발발하자 우연하게 해병사단 의무대에 합류, 장진강변과 백두산록(白頭山麓)전
투에 참여했으며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 남하한 쾌남아다.
 
미국 연수 후 귀국, 이화의대 외과를 거쳐 가톨릭의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미국 대통령 표창장
과 미국 자유훈장까지 받은 존재이다. 1995년 1,000여명이 모이는 대형 학술대회인 제4회
아시아 이식학회도 거뜬히 성공시키기도 했다.
 
미얀마의 아웅산 사태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순국한 故 민병석 박사는 인공신장기가 도입되
기 전 이미 복막투석법을 적용해 신부전환자들을 많이 치료했다. 이로 인해 성모병원은 일약
명의들이 모인 전당이란 소문이 날 정도였다.
 
특히 유행성출혈열(신증후출혈열) 환자에 복막투석을 시행해 많은 환자들이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유행성출혈열은 전쟁이 발발해 우리 민족이 어려운 처지에 빠
져 있는 시기에 유행한 괴질이어서 일반인들도 낯설지 않게 됐다. 이 병은 먼저 중부전선 군인
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급성으로 발열, 요통과 출혈경향, 신부전을 초래하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다.
 
우리는 이 병의 매개숙주가 들쥐이며 들쥐잡기를 하되 잡을 때 주의하고 그 배설물과의 접촉
이나 그 주위에서 숨을 쉴 때 주의를 하라고 신문이나 잡지를 통한 국민계몽을 했다. 이러한
계몽기사 덕분인지 1965년대 이후 명동성모병원에는 출혈열 환자가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효과적인 환자진료방법을 찾기에 골몰하던 민교수는 신장기능 부전현상이 환자의 생사를 좌
우한다는 점을 감안, 복막투석법을 이용해서 중증에 빠지기 이전의 환자 30여명을 완치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인공혈액투석기가 있었다면 더욱 효과적이었겠지만 이 장비는 우리나라에 한대도 없었
다. 복막투석에는 의사2명과 간호사 1명이 밤잠을 자지 못하고 24시간 시중을 들어야 했다.
당시 이러한 진료활동을 국내 어느 병원에서도 시도하지 않았을 뿐더러 의사나 간호사들이 밤
잠을 마다하고 가료를 한다는 것은 신문기사 거리였다. 의사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이 보
도되자 사회적인 반응은 대단했다. 여기에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 성공이 함께 보도됨으로써
성모병원은 품격과 인술을 시혜하는 의사들이 있다는 인식이 국민들에게 심어졌다.
 
중진 의사들의 대거 전출로 어려움을 겪던 성모병원은 이에 힘입어 중흥기를 맞게 됐다. 강남
의 반포에 더 큰 규모의 강남성모병원과 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여의도에도 성모병원이 건립되
는 등 가톨릭중앙의료원의 본거지가 새로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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