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병원 근무를 한지 얼마 안돼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여러 가지 발생했다. 더욱이 윤덕
선 의무원장이 외국 출장을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어려운 처지가 됐다.
 
의료원장 신부님이 나설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건들은 의료원장 김창열 신부님이
의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믿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끌었고 해결하기 어려웠던 사건은 분만실에서 아기가 바뀐 사건이었다.
 
분명히 출산 직후 `아들`이라고 의사가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산모와 아이의 할머니 등
가족들은 대단히 기뻐했었는데 퇴원하려고 보니 여아였던 것이다. 당황한 가족들은 여아를 데
려가기를 거부하고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며 아들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부렸다.
 
이 바람에 아이는 신생아실에서 1년 가깝게 수녀 한 분의 보살핌으로 자라났다. 그동안 사건
은 거의 매일 신문에 오르내려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출산을 기다리던 부모들이 잘못 듣는 바람에 빚어졌다. 문제의 여자아이는 그 날
두 번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연이어 태어난 아이는 남아였는데 이 세 번째 아이의 부모들이 성
별을 물어와 아들이라고 크게 응답을 했는데 두 번째 산모가 자기아이의 성별을 말하는 줄 잘
못 알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미 두번째 아이에 대해서는 레지던트가 여아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이를 해당 산모가
잘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또 차트를 정리하던 조산간호원도 두 번째 여아라는 소리를 잘 알
아듣지 못하고 세번째 아들이라고 외친 소리에 두번째 아이의 차트에 아들이라고 기재를 해버
렸던 것이다.
 
가족들이 거세게 항의를 하는 바람에 병원측은 7가지의 혈액검사를 실시, 그 부모들과의 관계
를 과학적으로 입증했지만 부모들은 막무가내였다. 변호사를 내어 송사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문제의 아이는 생후 7개월이었다.
 
병원장으로서 우선 이 일을 빨리 합리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간혹 병원을 찾
아오는 이 아이의 할머니를 내방으로 모셔서 과학적으로 할머니의 손녀임이 입증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약간의 배상을 해주겠다며 부모들을 병원
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1년 남짓 신생아실에서 수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
나는 어린이를 본 할머니는 손발이 부모를 닮아간다며 혼자 말을 하는 것을 분만실을 다녀간
일부 산모들 사이에 알려져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 후에도 수시로 그 할머니는 수녀가 보살
피는 그 아이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고 가기도 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에
이어 이들 부모를 조용한 음식점에서 만나 사건의 전말을 차분히 말했다.
 
이 사건은 말을 잘못 들은 아주 간단한 실수가 이처럼 크게 번졌다며 실수를 한 것이 젊은이들
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설득했다. 또 할머니께서 `손발이 애비를 닮아가더니
이제는 얼굴까지 닮아간다`는 말을 하시더라고 분만실 주변 산모들이 들었다는 말도 전했다.
음식점에서 약간의 동요만을 보이던 부모들은 그 후 이틀만에 그 여아를 안고 퇴원했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병원측은 미안한 생각에, 사과의 뜻으로 이 여아의 평생 무료진료권을 만
들어 전달했다. 사회적인 물의까지 빚은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됐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시끄러운 사건이 있었다. 나자로 마을 나환자들이 집단적으로 안양에서
올라와 명동성모병원 원장실 앞 복도에 누워 데모를 한 사건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병원 꼴
이 말이 아니었고 내원 환자들이 되돌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건의 발단은 윤덕선 의무원장이 외국으로 떠나기 전 나자로 마을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 우
선 한차례 음식과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한데서 비롯됐다. 윤의무원장은 처음 지원을 하면서
다음부터는 윗분들과 상의를 해서 해결해보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바쁜 김에 답변도 잊어버리
고 해외출장을 떠나버렸고 그들은 결국 끼니를 굶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의료원장은 긴급히 이 사실을 주교(主敎)께 알리고 난 후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불러 나자로
마을로 가자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김창열 의료원장과 차를 함께 탔고 그때서야 그는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면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동원해 함께 해결해보자고 했다.
 
아무 직책도 권한도 없는 내가 나이만 많다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 신부님은 가는 도
중 차 속에서 천부께 기도를 하면서 긴장했다. 나자로 마을에 도착한 김 신부님은 이곳에서 사
는 모든 나환자들을 마을 중앙의 빈터에 모이도록 했다. 나는 그때 나병으로 일그러져 흉한 얼
굴과 사지의 흉터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 참상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김 신부님은 겸손한 말로 병원 측의 잘못을 사과하고 윤 의무원장의 급거 해외출장으로 일이
이렇게 됐노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또 윤 의무원장과의 약속은 빠른 시일 내에 지키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나더러 자신의 말에 대한 보충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다소 황당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제까지의 내력을 잘 모르고 있다가 신부님께서 말씀해주셔서 알게 됐으며 이 자리에는
교수들 중 가장 연장자여서 참석하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나 권한도 없지만 인간적인 진심으로 김 신부님 말씀대로
곧바로 교수회의를 열어 이 약속이 이행되도록 노력할 작정이며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
는 교수라는 엄숙한 자리를 걸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표시했다. 이와 함께 일이 이렇게 된 것
은 우리 병원의 모두가 잘못한 일이라고 사죄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곳 나자로 성당에서 미사
지도와 기도를 했다.
 
나는 돌아오자 마자 교수회의를 열어 그간의 사정을 보고했고 그날 밤으로 쌀과 식료품 등 긴
급히 필요한 물품들을 비상재정염출로 마련했다. 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돼 마음이 가벼워졌
다.
 
성모병원으로 옮긴지 1년 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원장 발령이 났다. 또 의과대학에서도 2년
간만 근무한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으로, 병원장으로 발령을 한 것이다. 나는 한시적
근무자로서 더욱이 개신교신자이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 부서장자리에 오르리라고는 기대조
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의 의료원장에게 항의에 가까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자격도 없는 내가 이 유
명한 성모병원장이 될 수 있는가를 항의조로 따졌다.
 
이에 대해 의료원장은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원장 선임문제에 대해 주교회의에서 논의가 있
었습니다. 개신교 교인의 병원장 자격여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부님들이 `개신교교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바티칸 추기경회의 2차 회의에
서의 결정을 적용해서 승인을 하기로 했습니다"고 대답해주었다.

정리·권광도 기자 kdkwon@kimson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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