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희
김숙희산부인과의원 원장
서울시의사회 부회장
119 구조대 도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 받았던
그 시간을 생각한다

세월이 더 지나면
이 기억들도 희미해지겠지만
가능하면 오랫동안 기억하려 한다

지루한 일상을 탈출했던
그 화끈한 사건을…


1990년대에 대학에 들어가면 지금은 40대 초반이다.  1990년대는 88올림픽 이후 경제 호황으로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갈 것 같은 희망의 시대였지만 그 기대와 희망은 1997년 말 IMF 사태로 인해 그만 깨어지고 만다.
의료계도 1990년대의 호황에 같이 묻어가다가 경제 불황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의약분업 등 각종 의사들을 압박하는 정책들로 인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좌절 속에 빠져들어갔다. 2010년 이후부터는 자산가치의 저하와 경제 침체 등 업종과 나이에 관계없이 희망과 의욕이 식어버린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나도 개원의로서의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쉼 없이 달리다
1990년, 필자는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했다. 초창기였지만 개원이 자리 잡히면서 예금도 늘어났고 운이 좋은지 투자도 잘해서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게 됐다.

개원 후 7~8년이 지나면서 근처에 시설 좋은 산부인과들이 여기저기 늘어나면서 환자가 차츰 줄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쯤 나 자신도 24시간을 대기하는 것에 피로감과 싫증도 느끼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분만이라는 막중한 스트레스를 견디기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 나는 즉시 야간 분만을 포기하고 주간 분만과 외래만 보았다.

분만을 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유지가 되었지만 산부인과의사로서 개복수술도 분만도 안 하고 외래 진료만 한다는 것이 아쉬웠고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백화점 앞 대로변으로 의원을 옮겼다. 그 당시로는 꽤 많은 비용을 투자해 강남에 있는 병의원 인테리어 못지않은 시설을 갖췄다. 이때 IMF 이후 경제 불황이 시작됐고 의약분업 실시라는 큰 변화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많은 의사가 진료실 밖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필자도 일찍부터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을 통해 이런 변화와 조짐을 예견했고 의료계 앞날을 걱정하면서 투쟁에 직접 참여했다. 경제 불황도 문제였지만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이후 의약분업 실시와 함께 다가올 의료계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렇지만 이후 개원의로서 20여 년을 비교적 평탄하게 잘 해왔다.

다리가 부러지다
36년간 의사로서의 본업에 충실했다. 최근 10년간 본업은 소홀했지만 다양한 사회단체나 의사단체 일에 적극 참여했다. 남들보다 바쁘고 다양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24시간 틀에 갇혀 무섭도록 규칙적인 생활에 젖어 있었다. 정확한 기상과 취침 시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끔 여행을 가면 일상 파괴의 신선함이 있었지만 어김없이 낯선 곳에서의 불면과 피로로 힘겨워했다. 그럼에도 항상 규칙과 일상을 깨뜨리는 뭔가를 기대하고 살고 있었다. 환경이 바뀌거나 불규칙한 생활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면역력을 원했다.

2월 4일 내 일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출근 시 병원 주차장 얼음판에 미끄러지면서 건물 모서리 벽에 다리를 강하게 부딪치면서 심각한 복합골절이 왔다. 다행히 그날 바로 수술을 받고 4주는 입원과 안정, 그 후 8주는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고 12주 만에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한 달간 휴진하고 두 달은 보조기와 목발을 사용하면서 진료했다. 

내가 그렇게 기대하고 바라던 일상의 탈출이 파격적인 형태로 찾아온 것이다. 36년 동안 한 번도 몸이 아파서 진료를 안 한 적은 없었다. 의사가 환자가 되었던 3개월.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되어 느낀 것처럼 의사로서 반성하는 계기도 됐다.

휴진을 하는 동안 진료실을 하나 더 만들고 초음파 등 의료기기들도 더 구입하고, 젊은 산부인과 의사와 직원도 채용했다. 간판도 새로 바꾸고 홈페이지도 보완하면서 새로 개원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시작했다. 산부인과 외래진료만으로 전문의 두 사람의 인건비가 나오기 어렵지만 내 수입을 줄이고 시간을 얻기로 했다. 이제 8개월이 지났고 지금은 그런대로 병원이 유지되고 있다.

결국 사고로 인해 지난해 화창한 봄은 창문 밖에서 지나갔다. 아침저녁으로 실내 자전거를 타고 체조를 했더니 근육도 되살아나고 지금은 오래 걸어도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다. 가벼운 등산도 하고 골프도 치고 여행도 다니고 있다. 

지금도 119 구조대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을 받았던 그 시간을 생각한다. 세월이 더 지나면 이 기억들도 희미해지겠지만 가능하면 오랫동안 기억하려 한다. 지루한 일상을 탈출했던 화끈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다. 파격적 '휴가'를 보낸 지난해를 되돌아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앞으로 나이 들면서 다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날들이 오겠지만, 지금은 희망으로 가득찬 날들이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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