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건강보험 이대로는 안된다 下] 가입자·공급자·정부 요구조건 제각각...사회적 협의체 만들자

국내에 국민건강보험이 도입된 것은 1977년,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을 달성했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포괄적인 의료보장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나라로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부러워 하는 우리의 건강보험과 의료체계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전문가는 그 지속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형태라면 가까운 시기에 큰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언제부터,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걸까? 건강보험과 우리 의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저수가-저부담-저보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적정수가-적정부담-적정보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상>건강보험, 재정 확대없인 지속성장도 없다
<하>"공짜 점심은 없다" 혜택만큼 부담 늘려야

건보료 인상 전제조건, 가입자 “보장성 강화 최우선”

각계 전문가, 건보 이해당사자들도 몇 가지 전제조건만 해결된다면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첫째는 보장성 강화다.

2011년 정부가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대다수가 보장성 확대에 대한 필요로 인해 민간보험에 가입한다고 답했다. 당시 응답자의 79.6%는 민간보험 가입 이유로 '건강보험만으로 충분히 보장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을 냈다.

이에 앞서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가 실시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76.4%가 '국민 1인당 월평균 1만 1000원을 더 내는 대신 건강보험 혜택을 늘리도록 하자’는 데 찬성의견을 냈고, 설문 참여자 절반 이상이 추가부담으로 보장성이 확대된다면 민간의료보험에 더 이상 가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만 1000원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OECD 평균 이상인 90%까지 확보하기 위해, 국민 1인당 추가부담해야 하는 금액을 환산한 것이다.

시민사회 관계자는 "건강보험만으로 충분한 보장이 된다고 가정한다면 건강보험료 인상에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월 1만 1000원을 더 내서 더 많은 보장을 받자는 ‘건강보험 하나로’는 건보료 인상 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보장성의 우선순위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명확히 정하고, 보장성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비급여 부분이 우선 정리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살 길 막막한 의료계 “수가 정상화 선결”

의료계도 비급여 의료비 부담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한다. 다만 비급여 해소가 수가 정상화 문제와 함께 다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건보공단은 쇄신위 보고서를 통해 “건보 보장률이 2007년 64.6%에서 2010년 62.7%로 감소하는 동안 비급여 본인부담금은 2006년 13.3%에서 2008년 15.2%, 그리고 2010년 16.0%로 늘었다"며 "비급여 관리기전의 부재로 보장성 확대보다 비급여가 더 빠르게 증가해 보장성 정책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정부가 올해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를 시작으로, 국민 의료비 부담을 늘리는 주 원인으로 꼽힌 이른바 3대 비급여를 개선해나가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병원계 관계자는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는 병원계에서 수익보전의 수단으로 쓰여왔다"며 "이는 원가이하의 수가를 보전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급여를 원가보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대해 정부도 암묵적으로 동의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의료비 부담을 줄이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를 모조리 병원계의 부담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며 "비급여 개선작업은 반드시 수가정상화와 맞물려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수가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나 시민사회 등 의료계 외부에서도 공감대가 확산되는 추세다.

김춘진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행위의 보수가 낮다 보니 병원들이 소위 돈 되는 비급여 진료를 통해 손실을 메우거나 짧은 시간 많은 환자를 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며 "의료계의 인재들 또한 낮은 수가를 피해 특정과로 편중되는 문제가 발생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급여진료가 늘면서 국민의료비 부담이 늘어나는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의료의 질 보장과 장기적 차원의 재정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합의 안에서 올릴 것은 올려야 한다. 진료수가만으로 병원 운영이 가능하도록 기형적으로 책정된 의료수가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출·부과체계 합리화로 '건강보험' 신뢰 회복

건강보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건강보험 지출, 부과체계의 합리화가 이에 해당된다.
현재룡 건보공단 급여보장실장은 “혜택을 얻는 만큼 보험료를 올려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파이만 키우면 오히려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파이를 천천히 키우되 국민이든 의사든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줄여야 한다”며 “정상화할 수 있는 부분은 일단 정상화하고, 돈을 내는 측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1-2-3차로 이어지는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이다. 그는 의원은 외래, 병원은 입원 중심으로 이어지는 전달체계를 확립해 환자들이 경증질환으로 대형병원을 찾는, 재정누수요인을 막아야 한다고 봤다. 경증환자가 가급적 동네의원을 찾게 하자는 것인데, 교육과 상담 등을 통해 환자들을 ‘옆에 묶어두는’ 동네의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직장가입자와 소득 500만원 이상 지역가입자, 소득 500만원 이하 지역가입자로 사실상 3원화돼 있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건강보험은 직장과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부과체계를 이원화, 직장가입자에 대해서는 보수월액(근로소득)을, 지역가입자에 대해서는 소득과 재산·자동차보유여부 등을 모두 포함해 보험료를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같은 건강보험 가입자인데도 부과체계를 달리하고 있다 보니, 소득과 재산이 많은 자영업자가 직장 가입자격을 허위로 취득하거나, 직장 피부양자로 보험료를 전혀 납부하지 않은 채 건보 혜택을 받는 불형평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 또 직장을 잃어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자격이 변동되는 경우, 소득이 끊겼는데도 오히려 보유 재산으로 인해 내야 할 보험료가 더 늘어나는 사례도 벌어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건강보험공단에 제기된 보험료 관련 민원이 2013년에만 5730만건에 이른다. 이는 전체 건보공단 민원의 80%에 해당되는 수치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를 가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해법은 여전히 제각각이다.

시민사회 관계자는 “보험료 부과대상 소득을 어디까지 규정할지 등 구체적인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며 “아울러 건보 무임승차 논란을 빚고 있는 피부양자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해법을 마련해야 국민들이 형평성에 대한 의심없이, 믿고 보험료를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고지원 정상화·건보 운영비 투명화"...정부·공단도 할 일 해야

▲2007년~2014년 건보 국고 과소지원액 현황(국회 입법조사처)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국가와 건보공단의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고 과소지원은 해마다 반복되는 병폐 중 하나. 현행 건강보험법은 사회보험에 대한 국가 책임성 차원에서 매년 보험료 예상수입액의 100분의 14를 국고에서 지원토록 하고 있으나, 보험료의 결정 시기가 예산 평성 및 심의 시기와 맞지 않다 보니, 보험료 예상수입액이 예상수입액이 실제수입액보다 과소추계됨에 따라 매년 실 지원액이 법정 규모에 못 미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실제 보험료 예상 수입액 과소추계로 인해 정부가 덜 내놓은 건강보험료는 2007년 5788억원, 2008년 8615억원, 2009년 5084억원, 2010년 7769억원, 2011년 1조 3454억원, 2012년 1조 7718억원, 2013년 1조 9027억원 등 최근 7년간 7조 7455억원에 이르고 있다.

이에 국회 차원에서 국고지원 현실화를 위한 입법작업들이 진행돼 왔으나,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은 내지 못한 상태다. 국회 예산처는 건보재정에 대한 감시감독 체계를 강화하자는 측면에서 건보재정을 기금화해야 한다는 주문도 내놓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건보공단의 관리운영에 관한 비용 또한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2000년 직장·지역의보 통폐합 때부터 건강보험공단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 없다”며 “건강보험공단의 인력은 적정한지, 외국 유사 기관에 비해 너무 과도한 인건비와 운영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의료수가에 대해서는 원가를 공개하자, 따져보자 하면서도 정작 건보공단 운영에 관한 원가, 적정 운영비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기 않는다”며 “공단 운영에 관한 내용을 감시, 정말 공단의 말대로 업무강도가 높아 인력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면 인력을 충원해도 좋다. 다만 그 반대라면 효율성, 건강보험 지출 합리화의 측면에서 쳐 낼 것은 과감히 쳐 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적정수가-적정부담-적정보장 선순환 구조 만들자”

수많은 과제를 떠안고 있지만, 건강보험료 인상논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임익강 대한개원의협의회 보험이사는 “그간의 수가 정책은 총 재정규모는 고정해 둔 채, 어딘가의 돈을 빼내어 정부가 더 필요하다고 보는 분야에 가져다 주는 식으로 진행돼 왔다”며 “전형적인 조삼모사 정책이 반복돼 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단 파이를 키우고, 늘어난 부분을 일차의료나 필수의료 등 필요한 부분에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인석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건강보험료 인상은 저수가와 의료체계 정상화, 지불-부과체계 개편 등 다양한 문제들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며 “지금과 같이 각각의 과제에만 매몰된 형태라면, 보험료 인상은 요원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공짜 점심은 없다. 건강보험과 우리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혜택과 부담을 동시에 늘려 적정수가와 적정부담-적정급여의 선순환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지금이라도 각계가 참여하는 사회적 논의체를 구성, 건강보험료 인상을 위해 건강보험 수지와 관련된 사항들을 투명하게 내어놓고 합리적 해법을 찾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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