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심화·저수가 등 개원 상황 악화...전문의 절반 이상 개원시장 밖 '둥지'

개원 포기 젊은 의사·경영난 중장년층·은퇴 앞둔 노년층까지 '병원으로'
‘내외산소·피안성’ 지고 ‘정재영’ 뜨고...봉직-개원 전환 쉬운 곳 선호

#. "언제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나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월급 받을 때가 행복했다는 개원 선배들의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질 않아요. 빚을 내 개원했다 낭패를 봤다는 얘기도 많고….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4년 전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의사 A씨. 학창시절에는 동네 목 좋은 곳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원을 열고 환자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을 꿈꿨지만, 매일을 전쟁터처럼 살고 있는 개원 선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접었다. 요양병원 봉직의로 근무한 지 3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개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손사래를 쳤다.

전문의 면허 소지자 절반 이상이 봉직의, 이른바 월급의사 형태로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5년 전 2만 9000여 명 수준이었던 봉직 전문의 숫자는 이제 4만명에 육박한다.

전문의 자격 취득 후 수년 내 개원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동네의원 포화현상과 십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저수가 정책이 맞물리면서, 설 곳을 잃은 의사들이 개원시장 밖에서 활로를 찾는 모양새다.

봉직 선호현상으로 이른바 '인기과'의 자격도 달라지고 있다. 개원시장 전통 강호인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의 시대를 지나 상대적으로 일이 덜 고되면서 봉직-개원 전환도 용이한 '정재영(정형외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이 수년째 각광을 받고 있다.

개원의-봉직의 비율 역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현재 현직에서 활동 중인 전문의는 7만 3096명. 이 중 병원과 요양병원 등에서 월급의사로 근무하는 봉직의가 전체의 54.2%인 3만 9622명으로 집계됐다. 개원 대신 봉직을 택한 의사들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 것.

2007년 상반기에는 전체 전문의 가운데 54.6%, 2008년에는 53.3%, 5년 전인 2009년에도 전체 전문의의 절반 이상인 50.7%가 개원시장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탈개원 현상이 수년째 지속되면서 봉직의 비율이 개원의 비율을 앞지르는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실제 2009년 상반기와 올해 상반기 전문과목별 봉직의-개원의 비율을 비교한 결과, 26개 전문과목 가운데 마취통증의학과와 병리과, 직업환경의학과 등 3개 과목을 제외한 전 진료과목에서 개원의사의 비율이 줄고, 봉직의사의 비율은 늘어나는 현상이 목격됐다.

봉직의사 비율이 가장 눈에 띄게 늘어난 곳은 재활의학과와 가정의학과다. 재활의학과 봉직의사 비율은 2009년 상반기 68.1%에서 올해 상반기 76.9%로 5년새 8.8%p 늘었으며, 가정의학과 봉직의사 비율 또한 29.1%에서 36.3%로 7.2%p 늘어났다.

외과와 결핵과, 정형외과 등에서도 봉직의사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외과 전공 봉직의 비율은 2009년 상반기 49.6%에서 올 상반기 56.6%로 7%p, 결핵과 봉직의는 27.9%에서 34.6%로 6.7%p, 정형외과 봉직의는 55.2%에서 61.4%로 6.2%p 증가했다.

가정의학과와 외과는 대표적인 개원전문과목. 가정의학과의 경우 2009년 전문의 자격 소지자 70.9%가, 외과는 50.4%가 개원의로 활동했었다.

저출산의 직격탄을 맞은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에서도 개원의사 비율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산부인과 개원의 비율은 60.6%에서 55.1%로 5.5%p, 소아청소년과 개원의는 65.1%에서 60.1%로 5%p 감소했다.

 

재활·가정·외과 전문의, 요양병원으로 흡수

개원시장을 떠난 의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일단 재활의학과와 가정의학과, 외과 전문의 상당수가 요양병원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요양병원에 둥지를 튼 재활의학과 전문의는 5년새 숫자로는 168명에서 400명으로 2배 이상, 비율로는 전체의 16.5%에서 24.8%로 8.3%p 늘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또한 2009년 387명, 9.4%에서 올해 상반기 874명, 전체의 16%로 늘었고 외과 전문의도 220명, 4.5%에서 537명, 전체 전문의 대비 9.8%로 수준으로 증가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병원과 요양병원으로 분산된 추세다. 심평원 통계에 의하면 병원 봉직 산과 전문의 비율은 2009년 15.3%에서 올해 19.2%로, 요양병원 봉직 산과 전문의는 1.9%에서 4.4%로 증가했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이 늘어나면서 병원급 종사자의 숫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정형외과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상급병원과 종합병원, 병원 등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으로 골고루 분산됐다.

''봉직>개원' 현상을 놓고 전문가들은 "의사들의 이유 있는 선택"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개원가 내부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이 첫번째 이유다. 개원시장 포화와 장기불황으로 인해 신규 개원의들의 진입문턱이 높아지고 투자심리가 위축됐고, 폐업 의원까지 늘면서 개원가 밖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더불어 요양병원·전문병원 증가로 봉직의 수요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들이 개원시장에서 병원으로 이동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조철흔 초빙닷컴 대표는 "동네의원의 숫자가 늘어 경쟁이 심해지면서 '개원=성공'이라는 공식이 완전히 깨졌다. 10군데가 개원해도 잘되는 곳은 1~2곳에 그치다 보니 의사들이 개원을 꺼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B외과의원장은 "기존 의원 가운데서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있는 곳이 속출하고 있는데, 하물며 예비 개원의나 신규 개원의의 상황은 어떻겠나"라면서 "개원을 포기한 젊은 의사들, 개원에 실패한 중장년층 의사들은 물론 은퇴를 앞둔 노년층 의사들까지 병원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인기과목도 재편…‘정재영’ 각광

탈개원-봉직선호 현상으로 '인기과'의 자격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개원이 용이했던 내과와 외과·산부인과·소아과 등 이른바 '내외산소'가 각광을 받았지만, 저수가의 지속으로 급여과가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대표적 비급여과인 피부과와 안과·성형외과를 통칭하는 '피안성' 이 급부상했다.

피부미용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다소 사그러들긴 했지만 개원을 꿈꾸는 의사들에게는 여전히 '피안성'이 최고의 인기과로 꼽힌다.

최근 정형외과와 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를 통칭하는 '정재영'이 소위 가장 뜨는 과에 속한다. 외과계열에 비해 업무강도가 크지 않은 데다, 봉직과 개원 모두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같은 이유로 이비인후과 또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조철흔 대표는 "정재영은 근무강도에 비해 대우가 좋은 데다, 병원에서의 수요도 꾸준해 최근 몇년간 가장 각광받는 과목으로 꼽히고 있다"면서 "봉직-개원 전환이 용이한 진료과가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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