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의학 학위 개혁 목소리 커져... 학위와 자격 연계 의견도 나와

▲ 임상의학 학위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모 대학병원에서 내과 2년차 전공의로 근무하는 A씨는 주임교수 B씨로부터 자신의 연구에 참여하고 박사학위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할 수 없는 처지의 A씨는 원하지 않는 박사학위를 이수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A씨처럼 교수의 권유로 억지로 석사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사례는 의료계에 만연해 있다. 전공의를 하면서 석·박사 공부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의료계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전공의는 교수와의 관계와 미래를 위해 암묵적으로 잘못된 거래에 동의하는 것이다.

김병수 고려의대 교수는 "전공의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받는 사람이면서 노동자였기 때문"이라며 "파행이라기보다는 겸업이라는 시선이 맞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들어오면서 근로자로 해석하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잘못된 관행은 개원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박사 학위가 병원 홍보라는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 대부분 개원의는 수업료만 지불하고, 연구는 기초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대신한 후 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최근 한국의학교육평가원 등을 중심으로 서로 알면서도 쉬쉬했던 임상의학 학위제도에 관해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교수 논문 위해 전공의가 학위 따야 하는 현실

임상의학 학위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급물살을 타는 것은 의료계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개원가에서는 박사 학위가 환자들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고, 전공의들도 더는 학위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5일 의학교육평가원이 주최한 '임상의학 학위제도 개선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서덕준 한국의학교육학회장은 석박사 학위를 하는 사람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개원의들도 의학박사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 학위를 하지 않는 추세고, 3년차 이상의 전공의들도 박사를 하지 않는다"며 "대학원에 기초의학을 전공하는 의사가 감소하면서 교수들이 자신의 연구나 논문 작성을 위해 전공의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또 "과거에는 기초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의대를 졸업하고 조교신분으로 했지만 지금은 의대를 졸업한 사람이 거의 없다"며 "어쩔 수 없이 교수들이 생물과나 공대를 나온 사람에게 의학석사나 박사 학위를 준다고 데려오고 있다"고 토로했다.

지금까지의 임상의학 학위 과정을 반성해야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고려의대 김병수 교수는 전공의들이 온종일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하루 내내 공부해야 하는 박사를 취득하고, 개원의들이 진료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불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미국이나 영국은 임상진료와 대학원 혹은 연구 교육제도를 운용하고 있어, 전일제 연구를 하지 않는 한 박사학위를 진입할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임상의학 학위 과정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학부속병원에서 교수로 남으려는 전공의들은 교수들과 관계를 지속해야 하고, 의국의 일원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석·박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개원의들의 학위 과정이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전공의들은 집단적 분위기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임상학위 개혁보다는 폐지해야

임상 의학 학위를 개혁보다는 폐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임기영 아주의대 교수는 의료계 내부에서 이 문제를 끝내지 않으면 외부의 힘으로 끝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임 교수는 "개원의가 간판 따러 혹은 교수 뒷바라지하러 학위를 따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교수들이 자신의 연구를 위해 석·박사 난발하고 그 이후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반성해야 한다"고 반성을 요구했다.

임상의학 학위 과정이 제도 때문에 파행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의료계의 필요에 의해서라는 지적도 나왔다. 허윤정 아주의대 교수는 임상의학 학위과정을 풀 타임 전공의를 하면서, 풀타임으로 학위과정을 하는 등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도록 한 것은 의료계 자신이라고 꼬집었다. 무뎌진 의료계의 윤리의식을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이다.

허 교수는 "의료나 직무와 관련된 보편적 윤리에 대해 받아본 적는 의사들이 황우석 교수 사건이 터지고 배아윤리라는 현실에 마주쳤다. 배아윤리는 본인과 무관해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해 의료윤리에 대해 소홀해졌다"며 "의사나 학위, 윤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문제들"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지금과 같은 허술한 학위제도를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게 허 교수의 예측이다. 2011년 면허 재등록, 보수교육 강화 등 복지부가 공식적인 관리에 들어갔다는 것을 증거로 들었다. 허 교수는 "복지부가 곧 학위관리에 관한 질 관리와 이를 제도활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객관적이 조건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학원의 질관리, 대안 될까?

부실한 임상 학위에 대한 지적은 많지만 뾰족한 대한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이든 폐지이든 이 일을 누가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주인도 없는 상태다.

▲ 전문가들이 현재 전공의나 개원의가 취득하는 석박사에 대한 문제점에 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서덕준 한국의학교육학회장은 "여러 곳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라 솔직히 명확한 대안은 없다"며 "의학교육의 이상을 실현하는 의학교육평가원이라면 이 문제를 논의하고 끌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며 "의대교수들은 이 작업을 하기 힘들 것이다. 석·박사가 필요한 사람이 하게 하고, 필요 없는 사람은 안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의평원의 몫"이라고 밝혔다.

양은배 연세의대 교수는 학위 취득에 관해 대학원들이 질관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양 교수는 개원의들의 필요와 전공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한 대학원 진학은 부실한 임상의학 학위를 양산하고 있다. 교육목표나 과정 등에 대한 엄격한 질관리를 받는 의대와 달리 임상의학 학위제도를 운용하는 대학원은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운 학위논문들이 쏟아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연간 9400명의 박사 인력이 배출되고 이중 1100명이 의학분야 박사다. 1100명의 박사들이 과연 연구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는 "2012년 기준으로 석사과정에 있는 전공의가 1950명, 박사 및 석박사 통합과정에 있는 전공의가 784명이나 된다"며 "이들이 왜 학위과정을 이수하는지 심각한 논의가 필요하고, 대학원들도 의학분야 학위 질관리를 점검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임기영 아주의대 교수는 부실한 학위제도는 의대교수제도와 연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대학병원이 이해관계 때문에 교수를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임 교수는 "현재 전국 의대교수가 1만4000명 정도인데 대학부속병원이 병원을 확장할수록 대학교수가 증가한다"며 "서남대나 관동대 등이 의대가 부속병원이 된 병원에 있는 의사들이 교육이나 연구 능력 등에 무관하게 교수가 됐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앞으로 전임교수는 전일제로 PHD 마친 사람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만일 병원이 진료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전문의라 부르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학위와 자격 연계 주장도 제기

몇몇 교수는 제대로 전공의 수련을 마치면 학위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했다. 인턴 포함 5년 동안 수련을 마치고, 여기에 세부전문의까지 취득하는 의사에게 석사나 박사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한발 더 나가 양은배 연세의대 교수는 학위와 자격을 연계하는 것을 제시했다. '학교교육-직업훈련-자격의 상호연계'를 통해 유사한 과정을 중복적으로 이수하는 낭비를 막고, 현장에서 이뤄지는 비형식 학습을 포함한 다양한 학습을 국가적 수준에서 인정하자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미국이나 영국 등처럼 임상 학위가 원래의 뜻대로 쓰이려면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병수 고려의대 교수는 "미국은 NIH 중심으로 년 45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중개연구 전문가 양성과 학위 과정 등의 연구 교육에 투자하고 있고 영국도 연구 교육에 물적지원을 투입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0.1% 수재들이 의대에 입학하지만 정부는 전공의 수련교육과 임상의학 대학원 교육을 방치하고 있는 상태다. 수재가 입학하더라도 교육이 부실하면 그 자질을 살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연구수행이나 시설, 장비 등의 하드웨어 지원도 필요하지만 HT R&D를 창조적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를 산업화와 연계시킬 역량을 가진 인재가 필요한데 현재로서의 임상의학 학위과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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