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간인고(艱忍苦) 그린 세잔느
프랑스의 화가 세잔느(Paul Cezanne 1839-1906)는 남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강직하고 엄한 인물로 예술에는 전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다만 사업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 공동 출자로 은행을 설립할 정도였으며 장차 아들에게 그 은행을 물려줄 생각으로 화가가 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결국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으로 화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곡한 설득으로 드디어 1861년에야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파리로 가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세잔느는 파리 미술학교 시험을 보았으나 `색채를 너무 많이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다. 실망한 세잔느는 낙향하였다가 다음해에 다시 파리 로와 살롱 전(展)에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었으며 이런 것이 1866년에서 1869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실망이 계속되던 가운데 1870년에는 그의 모델로 일하던 마리 오르탄스 피케라는 19세의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며 동거생활을 하게 되어 1872년 1월에는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완고하고 무서웠기 때문에 일체를 비밀에 부쳤다.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수 년 후에는 이러한 사실은 탄로 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여 생활비를 반으로 감해서 송금해 주었다. 그래서 세잔느 일가는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온실 속의 세잔느 부인`(1880)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부인은 이를 참고 남편의 모델이 되곤 하였으며 이 그림 이외에도 세잔느는 그녀의 초상화를 무려 40여점이나 그렸다.
 세잔느의 아버지는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던지 오르탄스와의 결혼을 허락해 결국 17년 만에 장남이 14세가 되던 해 즉 1886년에 그녀와 아들을 세잔느의 호적에 입적하게 되었으며 그해에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이렇게 17년 동안을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이를 인내하며 오로지 남편의 모델을 함으로써 남편을 내조 하였던 것이다. 말이 17년이지 그 긴 세월동안 가난을 참고 견디어 낸 것을 `간인고`라 표현 했다. 비록 가난 하지만 남편과 자식이 있어 미래를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고생을 참고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무런 수식이 없는 그녀의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화가 세잔느는 대상을 주위의 세계에서 구별하는 기본적인 형태를 구했고 이러한 확고한 형태를 구해 낸다는 것은 단지 시신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작용임을 주장하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확고한 형태의 구성과 중후하면서도 밝은 색채를 잘 융합시키는 그림은 젊은 신진 화가들의 절찬을 받게 되었는데 돌이켜 보면 세잔느가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는 모든 고생을 참고 내조한 부인의 뒷받침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어머니의 신내고(辛耐苦) 그린 로트렉
 프랑스의 화가 로트렉(Toulouse Lautrec 1864-1901)은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남 프랑스의 알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 지방의 영주를 지낸 귀족의 가문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혈족간 결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촌 남매간이었다.
 근친혼 탓이었는지 로트렉은 어려서부터 허약했으며 10세경부터는 편두통과 하지의 피로감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피로감은 점차 동통 발작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아들의 증상을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혹시는 로트렉 백작 가문이 대대로 근친혼을 해 왔기 때문에 오는 증상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로트렉이 13세 때 의자에서 일어서다가 쓰러져 좌측 대퇴골의 골절을 입게 되었다. 열심히 치료하여 골절되었던 다리가 나을 무렵인 14세 때 다시 쓰러져 이번에는 우측 대퇴골의 골절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좌우 대퇴골의 골절로 인해서 그의 신장은 성장을 멈춘 상태로 150 센티 이상 자라지 않는 난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신내고`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화가가 된 로트렉은 식탁에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어머니를 모델로 한 `아델 백작 부인의 초상`(1881)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의 그의 나이 18세이었으며 이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의 대표작중의 하나이다.
 눈을 지그시 아래로 깔고 삶의 고뇌로 낙심에 가득 찬 모습이지만 슬픔을 내면으로 삭이려고 애를 쓰면서 무엇인가 굳은 결심을 다짐하는 듯 한 기품 있는 모습을 절절하게 전해주는 그야말로 `신내고`의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별거 중이었고, 그의 동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설상가상으로 슬픔이 겹친 때였다. 잃은 자식에 대한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기가 낳은 자식이 장애인이라는 것은 평생 짊어져야 할 고통으로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가 아니면 이해가 되지 않는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로트렉 모자간의 관계는 각별하게 돈독한 것 이었으며 또 로트렉은 불과 18세의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내면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평생 동안 화가로서의 열정과 고뇌, 신체적 열등감, 경제적 어려움을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호소했고 어머니는 장애인 아들의 너그러운 후견인으로서 혼자 슬퍼하며 고뇌하고, 한편으로 어린이처럼 착하고 허약한 아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며 격려하곤 했다.
 로트렉은 5년 후 그가 23세 때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말로메 성 살롱에 앉아 있는 아델 백작 부인`(1887)이라는 제목으로 또 그렸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옆모습을 그렸는데 부인은 5년 전에 비해 너무나 늙어 40대의 중년부인이라기 보다는 늙은 할머니의 모습이다. 불과 5년 사이에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장애자 자식을 둔 어머니의 심적 고통을 대변하는 것이다.
모습이 상하고 늙었지만 로트렉에게는 최대의 이해자이며 생의 동반자였다. 이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잘나고 예쁜 여인이라 해도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어머니는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이며 평생의 연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마치 공원에서 노는 어린이처럼 완전한 자유를 누렸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을 살아간 화가이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비록 37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행복마저 누릴 수 있었다.



그림 1. 세잔느 작: `온실안의 세잔느 부인` 1880,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림 2. 로트렉 작: `아델 백작 부인` 1881, 알비,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
그림 3. 로트렉 작: `말로메 성 살롱에 앉아있는 아델 백작 부인` 1887, 알비,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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