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선 가치 어디에 둘지 사회적 합의 필요

15. 입석금지와 환자안전

이재호
환자안전연구회
홍보이사
울산의대
응급의학과 교수
7월에 시행된 수도권 광역버스 입석금지 조치로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인터넷에선 졸속 행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입석금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들이 맞서고 있다. 사실 광역버스의 입석은 승객의 안전을 위해 법으로 금지한 부분이다. 불법을 근절하고 승객의 안전을 지키겠다는데, 실질적인 수혜자가 되는 많은 시민들은 이 조치를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조치로 정상적인 출퇴근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안전을 위협하는 입석 운행을 정부는 방관해야 할까? 광역버스의 증차나 전출구간의 확대, 지선교통망의 확충 등을 통해 입석금지로 발생하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에 혹시 입석 운행으로 큰 사고가 날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돌려야 할까? 이전에도 큰 사고가 없었으니 사고가 없기만을 바라고 있어야 할까?

광역버스 입석금지를 둘러싼 문제와 논쟁은 우리나라의 '안전'에 대한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 법은 승객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해 뒀지만, 현실에 이 법을 적용하려니 모두가 꺼린다. 이 법을 불필요한 규제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을 적용하면 광역버스 요금과 세금 인상이 불 보듯 뻔하고,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이전처럼 '안전'을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숨겨두고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우리는 '안전'을 담보로 일상생활을 계속 영위해야할까? 우리나라엔 '광역버스 입석운행'과 같이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안전'을 위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의료계가 그 대표적인 분야이다.

환자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의료진이 보는 환자를 줄이고, 각종 침습적 검사를 위한 사전·사후 조치를 강화할 경우, 진료를 받는 환자의 안전은 향상될 수 있지만, 많은 환자들의 진료대기 시간과 검사대기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

결국 시기적절한 진료를 받기 어렵고 이로 인한 또 다른 환자안전 문제가 대두된다. 의료기관은 시간당 보는 환자 수의 감소로 경영의 압박을 받게 되고 수가 인상을 요구하게 된다.

의료서비스의 제공자나 수혜자 모두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정부는 의료비의 상승으로 당혹스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럼 다시 없던 일로 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희생양을 찾는 방식으로 변경해야 할까? 환자는 보다 안전한 진료를 받길 원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해결방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환자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계, 정부, 환자들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불행하게도 '입석금지' 문제만큼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사회가 '안전'을 깊숙한 속에 숨겨두고 외형적 성장에 집착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관이 사회전반에 퍼져야 한다. '입석금지'가 현실적 난관을 핑계로 다시 '입석운행'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입석운행'은 어느 한 정치인이나 정부나 운수회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사회가 합의했던 카르텔인 것이다. 이전과 똑같이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바랄 수는 없다.

사회구성원이 지혜를 모아 이런 불합리한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고 현실에 적용해야만 우린 새로운 세계에 한 발 디딜 수 있게 된다. 의료서비스도 당장 보이는 편리함과 적은 비용에 만족하는 것은 '안전'을 담보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안전한 사회와 환자진료를 위해선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합의와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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