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식(林鍾湜)군은 1957년 서울의대출신으로 동기동창 외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체격도 여위고, 지금은 다르지만 얼굴도 화려(?)하지 못한데다가 발걸음도 정상
이 아니었다. 그는 인턴을 마친 후 전염병과에 입국해 공부를 해 보겠다고 레지던트 수련을 신
청해왔다.




당시 서울의대는 입학성적이 좋아도 불구 등 신체외형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의 품위 상 입학
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몇 해가 지난 후 입학성적이 좋고 안면의 기형이 아니라면 입학은 허용
하기로 원칙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정인데도 여윈 체격에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닌 임 군이 구술시험까지 통과, 입학을
한 것으로 보아 시험성적이 대단히 좋았던 것 같아서 입국이 허용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전염병과의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입국 허용의 한 이유였다. 그러나 문제가 적지 않
았다. 레지던트인 그에게 환자를 맡기면 `왜 신체적으로 정상이 아닌 의사에게 나를 맡기느
냐`는 것이었다. 늘 이런 경험을 한 나는 `의사가 학식이 많고 임상경험도 적지 않을뿐더러

음씨도 고와서 환자에게 잘 해주는 주치의가 될 것`이라고 달랬다. `왜 우리나라사람들은 이

게 인간성수양이 덜 되었는가, 우리는 아직 문화인과는 거리가 멀다며 나름대로 번민도 했다.
 
물론 미국도 불구자는 의대입학이 허용되지 않는 점이 생각나 이해하려 했지만 나를 믿고 장
래의 계획도 세웠을 임 군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점이 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나로서는 전염병교실의 앞날에 대해 웅대한 꿈을 꾸고 있던 시기였다. 현실에 어둡고 맹목적
일 정도로 장래에 대해 기대를 하는, 헛 꿈(?)을 꾸고 있었다. 따라서 전염병교실 발전에는 우
선적으로 면역학과 바이러스 전공학자가 필요하다는 전제아래 김윤범 군을 미네소타대학에
보내 순조로운 수련을 받도록 했고 다음이 바이러스학을 전공할 젊은 의사를 양성해야 할 차
례라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레지던트를 시작한지 2개월 가량이 지난 어느 날 임 군을 불렀다. 그간 겪은 일들이 현실적으
로 피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보다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지
않겠느냐며 미국 유학을 통해 바이러스학 전공을 할 의사를 알아보았다.
 
임 군도 2개월 간의 임상체험으로 많은 것을 생각한 바 있었는지 선뜻 동의를 표시했지만 집
안형편상 유학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며 해결방법을 물어왔다. 김윤범 군과 마찬가지 사
정이었다.
 
나는 미네소타대학 유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만나보았던 신시네티대학 세이빈(Sabin)
교수에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편지를 썼다. 그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젊은이라면 바로 보내주어
도 좋다는 답장이 왔다.
 
소아마비에 대한 생약경구용(生弱經口用)백신을 개발해 세계적인 화제가 된 바 있는 세이빈
교수를 만난 것은 내가 미네소타대 유학에서였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와 친우였던 고 윤
일선 당시 서울대총장의 친서와 함께 연구소의 견학을 허용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편지
를 보냈었다. 그는 내가 도착하자 극진하게 맞아주었고 견학을 하는 동안 내가 기거할 하숙방
을 연구소 인근에 마련해주기도 했다. 또 이 연구소에 근무하는 조수 한사람을 딸려주어 연구
소와 연구과정을 세밀하게 설명하게 했다.
 
임 군은 병원에서 할 일이 없어져 영어공부와 바이러스학을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 가기 위해 의무적으로 치르는 ECFMG 시험에도 이미 합격할 정도로 성실하고 명
석했다. 미국에서는 이 시험에 합격해야 인정받는 의사가 되고 월급도 제대로 받을 수 있었
다.
 
임군은 드디어 1958년 세이빈 교수의 초청으로 신시네티대 폴리오연구소로 떠났다.
 
그 후 2년간 생약경구용 백신을 만드는데 전념하던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연구를 하지 않고 있
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이 연구소의 백신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학자를 찾아 새로운 바이러스분야를 공부하라고 충고해주었다. 그
가 귀국을 해도 아직 몸 담을 바이러스 연구소가 없는 형편이어서 더 훌륭한 학자를 찾아 연구
에 정진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미국연구생활은 세계적인 석학들과의 만남 등
으로 원숙해졌다. 처음 2년 간 그는 주로 소아마비백신을 연구했고 61년에는 레오바이러스,
62년에는 일본뇌염 바이러스, 62∼64년에는 소아설사, 64∼66년까지는 미국 출혈열병원
균 등의 전염병을 연구했다. 또 66년 미 국립암연구소(NCI)로 자리를 옮겨 암연구로 진로를
전환해 99년까지 암인자, 그 후 지금까지 전립선암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초부터 미국군인의과대학(USUHS)내에 전립선암센터를 창설해 월터리드 육군
병원 비뇨기과에서 보내오는 전립선암재료를 대상으로 100개 이상의 전립선암 초생세포배양
(Primary cell culture)을 확보했다. 또 이를 Telomerase(세포가 죽지 않게 하는 유전자)
를 사용해 새로운 세포주를 만들어 그 예방과 치료 물질 규명에 노력하고 있다. 지난45년간
그는 주연구자로 된 논문만 280여편이나 발표했다. 그를 지도해준 학자들은 A. B, Sabin교
수를 비롯 J. L, Melnicke, W.McD, Hammon, Robret J. Huebner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
 
그의 성실과 부지런함은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았다.
 
1980년경 신부감을 만났다고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가 왔다. 나는 그가 연구할 기초능력을 쌓
았다는 생각에 허락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오랫동안 연하장이나 보내는 식으로 안부를 전
하던 그는 1995년 겨울 부인과 함께 서울에 왔다.
 
부인 메리는 다소 살은 찐 형이었으나 늠름하고 어질게 생겨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결혼 후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딸 하나쯤은 있어야 집안 분위기가 좋아질 것 같다는 부
부의 생각과 아들들의 요구로 한국여자아이를 입양하려고 온 것이다. 그것도 부인이 한국어린
이를 입양하자고 제안을 했다는 말에 놀라기도 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3년이 지난 1998년이었다. 미국에 있는 자식들의 성화에 못이겨 미국
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한미의학회(KAMA, 플로리다)로부터 모국 의학교육에 수고했
다고 표창장을 주겠다고 초청을 해와 겸사해서 떠난 것이다.
 딸과 함께 미국을 순회하는 도중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에 있는 임 군의 집을 방문했다. 그곳
에서 90세인 임 군의 어머니를 만나 밤늦게까지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임 군 어머니는 장남인 그의 형이 모시도록 돼있었지만 부인 메리가 자기가 꼭 모시겠다고
요청하는 바람에 차남 집에 와 있다며 `어느 한국 며느리가 이렇게 시어머니를 잘 모시겠느
냐`며 감탄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얼마 후 돌아가셨다.
 그동안 임 군의 주요업적인 논문의 일부를 받았다. 그 내용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암 유
발과 암원성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결과이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미국국립암센터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연구활동을 하다고 최근 베데스다에 있는 Uniformed Services University of
the Health Science의 교수로, 워싱턴의 조지타운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암발생 연구에 종사하면서 화학적 발암물질이 종양성 변형을 유발하는 현상을 인간 골
육종(骨肉腫)세포주에서 처음 확인했으며 이는 정상세포주가 발암유전자에 의해 종양세포로
발전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알아내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상피세포가 종양세포로 변형하는 과정을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으로 확인, 정립한 연구결과로서 다단계 발암기전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세포배양을 통해 발암성화합물, 방사선 조사, 발암유전자 주입, 종양바이러스
감염 등이 암 진행 단계에 관여한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최근 임군은 전립선 질환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전립선 조직과 전립선암 세포주들을 확보, 관
련연구자들에게 제공해주면서 전립선암 발생기전의 공동연구를 광범위하게 시도하고 있다.
전립선암은 미국에서는 제일 흔한 어른들의 악성종양으로 돼 있다. 그가 암발생기전에 도전하
고 있는 노벨상수상자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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