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현실의 문제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엄격한 얼굴을 하고 모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문지기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하나하나 끄집어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철학자 자신들의 잣대대로 판단하고 철학에 몸담은 이들만 사용하는 언어로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됐다.

저자 와시다 키요카즈는 '인문학의 위기, 철학의 위기'가 그렇게 시작됐다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제 철학은 입을 닫고 일반인의 곁으로 내려와 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모두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 존재다. 매일 발생하는 강력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치열한 경쟁에서 언제 도태되어 일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이런 사회적 위험이 아니어도 인간은 천재지변 앞에 너무나도 미약하다. 어쩌면 나약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을 잘 조절하고 치유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받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위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이 책은 '듣기'가 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동시에 말하는 이에게 자기이해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양한 시도를 통해 '듣기'라는 행위가 가진 철학적 힘을 밝힐 뿐만아니라 철학이 복원해야 할 것이 이렇게 귀를 여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을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함께 있다는 사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듣기의 철학은 이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다.

철학의 본령은 발밑에 세상을 꿇어앉히고 모든 것을 망라해 '높은 수준의 시각'을 뽐내는 것이 아니다. 삶을 구성하는 존재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그 가운데서 배움을 얻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철학, 듣기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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