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응답하라 의료윤리
내가 생각하는 의사직업윤리

맹광호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의료윤리학회
명예회장
지난 5월 10일 밤, 자택에서 급성 심근 경색증 증세를 보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집에서 가까운 순천향대병원 응급실을 거쳐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기까지 한 시간 남짓한 상황을 TV 방송으로 보면서 마치 007 영화를 보는 듯한 긴박감마저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짧은 시간에 적절한 응급치료를 시행해 이건희 회장의 생명을 구한 의료진의 활약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높은 의료기술 수준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토록 신속한 이송과 최고 수준의 전문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이건희 회장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회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상황을 맞았다면 과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에서다. 

교육·소득 격차로 건강불평등 발생
인간생명의 '절대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간생명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생명이 없이는 다른 어떤 가치도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은 가치 측면으로 볼 때 생명과 다를 바 없다. 건강이 곧 생명의 양(量)과 질(質)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건강을 위한 의료 활동과 그 활동의 중심에 있는 의료인의 존재가치가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건강은 반드시 의학적 지식과 기술에 의해서만 담보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이나 질병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소위 '건강결정요인(health determinants)’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보면 의료서비스 수혜 여부가 건강에 기여하는 비율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보다는 흡연, 음주, 운동부족 같은 개인의 건강행동, 그리고 교육이나 소득수준 같은 사회경제적 수준의 영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교육이나 소득수준 같은 사회경제적 수준의 차이는 사망률이나 질병이환율에 현격한 차이를 보임으로써 사회계층 간 소위 '건강불평등(health inequality)’ 현상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2010년에 발표된 한 연구논문에 의하면 소득수준을 4단계로 나눠 볼 때 우리나라 최상위계층 사람들은 최하위계층 사람들보다 남자의 경우 6.2년, 여자의 경우 1.7년 더 길게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수준별로 본 2004년의 또 다른 연구에서도 고교 졸업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망률을 기준으로 했을 때 중학교 졸업자의 사망률은 1.6배, 초등학교 졸업자는 1.8배였다. 이런 차이는 질병이환율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교육이나 소득수준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쉽게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경제적 수준 차이가 개선되지 않는 상태에서 민간의료 중심의 고가 의료기술 경쟁만 치열해지는 경우 국민의 건강불평등은 더울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일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접근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세계보건기구 (WHO)등에서 말하는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의 핵심이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 필요
원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은 가령 가정이나 기업 등 사회집단이 불우한 이웃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 내지는 '도덕적 의무'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그 내용이 인간의 생명과 연관된 건강이라는 점 때문에도 점차 '도덕적 의무' 이상의 '윤리적 책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이 2005년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가 제정한 ‘생명윤리와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이다. 이 선언은 인권 존중, 악행금지, 자율성, 그리고 정의 등과 함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중요한 생명윤리 및 인권에 관한 윤리원칙에 포함시키고 있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핵심적 윤리 원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서의 '건강권' 보장과 의료서비스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자원배분에 있어서 '정의'의 원칙을 실천하는 일이다. 건강권의 윤리 원칙은 '생명존중의 원칙'과 같다. 이는 건강이 인간생명을 유지 증진시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권 보장이 곧 의료 접근성 보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차의료 서비스로부터 시작해서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일이 국가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기본 내용 중의 하나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원하는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국가가 모두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유엔도 국가별 정치, 경제, 사회적 능력을 고려한 '달성 가능한 기준(attainable standard)’의 건강권 보장 노력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 '정의의 원칙'이 지향하는 윤리원칙은 기본 의료서비스나 사회경제적 자원배분에 있어서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사회적 형평성(social equity)’의 가치규범에 따라 이뤄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 건강이 곧 사회발전 원동력
사회계층 간 건강불평등의 해소는 그것 자체로 목표가 아니다. 사회경제적 환경요인의 개선을 위한 정책은 국민 건강수준을 높이게 되고, 이렇게 개선된 국민건강은 곧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윤리의 실천이 '멍에'가 아니라 '희망'인 것은 이처럼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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