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연히 지나치는 말로 의학연구를 추천했지만 나중에 세계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두 후배가 있다.
 
김윤범 군과 임종식 군이다.
 
김윤범 군은 평양의전 2학년 때 학교분위기가 좋지 않고 6·25 직후 이념문제로 학급에서 자
주 논쟁이 빚어지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과 친구들까지 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남하, 서울로 왔다.
 
영등포에 자리를 잡고 교회를 나가게 된 그는 친한 한 신도로부터의 소개를 받아 미군121야
전병원 검사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침 나는 종전 후 서울대학병원에 중앙검사실을 신설하고 시설 운영이나 검사의 질적 향상
을 위해 2개월 간 이 야전병원 검사실을 견학하던 중이었다. 내 자신이 검사실 운영에 초보자
였기 때문에 숙련된 의사나 의료기사를 확보하는 문제는 큰 과제가 되던 때였다.
 
특히 세균혈청부와 화학부에는 숙련된 기사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야전병원 검사실에서 이
러한 숙련된 기사를 빼내갈 도리는 없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이 검사실 실장과 기사들
과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고 힘쓰던 참이었다. 매일 검사실의 몇 분야를 다니면서 기사들의
일하는 태도와 기물을 다루는 자세를 눈여겨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세균혈청부의 김윤범 군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김 군과의 첫 만남이
었다. 이 검사실 실장도 김 군이 의과대학생이었으며 일도 열심히 하고 학구적이어서 모든 일
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마음에 드는 젊은이라고 극찬을 했다. 처음에 잡일을 시키다가 의대
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점차 고급 기술분야의 일을 수련받아 1년 반이 지난 지금 세균혈청
부 제2인자 격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맘에 쏙 들었다. 그때부터 김 군과 일과가 끝난 후
에 자주 대화를 하면서 그의 사정도 알게 됐다.
 
한번은 우연히 지나치는 말로 "진학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너무나
진지했다. 자기가 지금 이곳에서 일하는 것도 진학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나치
는 말을 했던 나는 다소 당황해 그런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
러나 내친김에 그를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야전병원 검사실장과 자주 만나 대화하며 서울
대병원 중앙검사실의 어려운 실정을 호소하다시피 했다.
 
각 교실에서 제각각 검사실을 갖고 있다가 전후에 중앙화하면서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
태라는 등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군만큼 일하는 사람을 추천해줄 것과 김 군
이 진학할 뜻을 갖고 있다는 말도 전했다. 실장도 김군의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
는지 가게 되면 다른 기관보다는 대학병원으로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한달 가량 더 기다
려보자는 말까지 했다.
 
결국 2개월 후 김 군은 우리 검사실로 오게됐다. 그때부터 중앙검사실 화학부는 교수 한 분과
김 군이 주축이 되어 활성화됐다. 여기에 기초 병리학교실이 조직병리검사를 맡게 되면서 전
국에서 제일 신임을 받는 검사실로 발전해갔다. 검사실의 수준은 약제내성검사를 받은 후 의
사가 항생제를 처방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 한 것이다.
 
이렇게 1년이 지난 1954년 김 군은 보결생 모집에서 합격, 서울의대 본과 1학년 학생이 되었
다. 그는 1958년까지 4년간 검사실에서 일하면서 졸업을 했다. 낮에는 의과대학생으로 공부
를 하고 강의가 끝나면 세균혈청부에 모아놓은 검사물을 야간에 처리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밤을 새우면서까지 완료시키는 열성을 보였다. 검사실 숙직실은 그의 전
용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태에 대해 몇몇 교수들은 반대를 했다. 검사에 대한 오류를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수개월간의 시험적 기간 중 그를 지켜본 모든 교수들은 진료에 지장이 없다고
인정하게 됐다.
 
당초 나는 전염병내과의 발전과 장래를 위해 젊은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후 원
조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와 협력관계를 갖고 있던 미국 미네소타대학으로 1955년 가
을 처음 연수를 갔다.
 
그 때 면역학, 역학, 공중 보건학, 생물통계학 등의 강의와 특수연구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임
상은 자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과 주임교수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면
학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행동했다는 감이 적지 않다.
 
연수가 끝나고 서울로 떠나오기 전날에는 내과주임교수인 시바톤(Syverton)교수를 만나 서
울의대병원 전염병내과 교실의 장래발전을 위해 면역학과 바이러스학을 공부하려는 젊은이들
을 이곳으로 보내려 하니 학비가 충분치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즉, 시간외에 청소나 기물정리, 심부름과 같은 잡무(알바이트)를 맡겨 용돈이라도 버는 일을
시켜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이같은 나의 요청에 대한 시바톤 교수의 반응은 악수를 하며 잡
은 손의 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김윤범 군을 우리교실의 장래를 위해 끌어들인 만큼 그의 유학까지를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기에 그의 의중을 물었다. 인턴생활을 끝내고 미국에 가서 면역학분야의 지식을 쌓
을 생각은 없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의 반응은 너무나 확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 전부터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유학비
용이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며 나의 의견을 선뜻 받아들였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단 힘이 들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
를 벌어보도록 했고 면역학분야를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1959년 서울을 떠나기 직전
교회 교우들의 도움으로 좋은 신부를 맞아 결혼을 할 수 있었으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처
지는 아니었다.
 
그가 미네소타의 내과학교실에 입국한지 2개월 가량 되는 시기에 면역학 교수인 왓슨
(Watson)의 수제자가 다른 부서로 영전돼 가는 바람에 자리가 비었다. 이 자리에 김윤범 군
을 영입하자고 시바톤 교수와 왓슨 교수가 상의, 합의함으로써 당초 계획한대로 면역학 전공
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들 두 교수는 김 군의 성실한 자세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교실에 입국한 후에도 김 군은 성
실하고 부지런한 활동을 함으로써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김 군의 입국과 거의 동시에 왓슨 교수의 면역학교실에서는 특수하게도 무균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왜소(矮小)돼지 사육장이 만들어졌다. 이 사육장은 돼지의 태반이 여섯 겹으로 돼 있는
것을 이용, 무균 하에 자궁을 절개, 항체반응이 일어나게 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면역반응을 탐
구하는 연구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같은 방법은 당시 다른 대학이나 병원에서 흉내를 내지 못할 정도의 색다른, 경이적인 연구
업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연구를 감당하는데는 업무량이 엄청나게 많아 그 누구도 함
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지런한 김 군이 아니었더라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교실원들이 많았다.
 
이러한 그의 부지런함과 뛰어난 연구활동으로 많은 업적을 내게 됐고 이로 인해 1960년 그
는 미네소타대학의 조교가 된 후 3년 만에 전임강사, 1970년에 부교수가 되면서 72년 LA 캘
리포니아대학의 방문교수까지 겸하게 됐다. 1973년 슬론 케터링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주임연구원까지 지낸 그는 1983년 시카고의대 미생물 면역학교실로 옮겨 현재 주임
교수를 맡고 있다. 슬론 케터링연구소 시절에는 코넬대 대학원교수(주임 73∼82년)도 겸임하
는 등 세계적인 학자로 추앙 받아 이 분야 학회의 국제위원, 그리고 4가지 면역학잡지의 편집
위원도 지냈거나 현역으로 있다.
 
최근에는 2∼3년에 한번씩 고향이 있는 북한에 항결핵제를 지원하면서 결핵퇴치사업에 진력
하고 있으며 다른 취미나 오락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건강하게 지낸
다는 소식을 접하면 기쁠 따름이다. 그러나 북한에 가더라도 그곳 시골에 있는 친족은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그로부터 연구지도를 받은 10여명의 후학들이 모여 그의 75세 생일을 축하하는
조용한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智根’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는데 그의 생활
과 성품의 일부나마 표시돼 당사자는 물론 나도 기뻐했다.

정리·권광도 기자 kdkwon@kimson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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