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응답하라 의료윤리
내가 생각하는 의사직업윤리

안상준
안산 단원보건소 공중보건의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고문
최근 시장경제의 영역이 확대되고 자본이 돈을 버는 시대가 되면서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그리하여 서양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올바른 자본주의의 방향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나톨 갈레츠키는 2010년 말 저서  ‘자본주의 4.0’에서 소프트웨어 뉴 버전 출시에 비유하며 자본주의 진로 찾기를 시도했다. 의료계도 경제계와 비슷한 흐름을 갖고 있어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타산지석 삼으면 의료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자본주의의 진화과정을 살펴보자.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1776년 무렵부터 자유방임을 원칙으로 하는 고전자본주의의 시대(자본주의1.0)가 시작됐다. 이후 시장실패로 인해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나 케인스가 내세운 수정자본주의(자본주의2.0)로 변화하며 큰 정부를 지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70년대에 들어서 세계 경제는 두 번의 석유파동을 겪게 되고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게 됐다. 이렇게 정부관리의 실패가 드러났고 밀턴 프리드먼 등의 시카고 학파가 내세운 신자유주의(자본주의3.0)를 배경으로 한 레이거노믹스가 등장했다.
 

30년이 넘도록 시장이 영역을 확대해 가던 중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파급되면서 신자유주의는 실패를 겪게 됐다. 이후 사회는 경쟁과 배려가 공존하고 기업과 공동체가 함께 어우려져 갈 수 있는 시스템, 즉 새로운 자본주의의 단계를 요구하게 됐고 이렇게 탄생한 자본주의 4.0의 핵심 원리는 "앞선 사람들이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고, 뒤처지고 실패한 사람도 재기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견인하는 것"이다.   ‘경쟁과 배려의 공존’을 위해서 시장의 자율성과 정부의 적절한 관리 속에서 전문가단체와 시민단체가 적극 참여해 정책을 함께 이끌어가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 
 
대한민국의 의료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비교해보면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 의료보험 도입 이전에는 국가가 의료를 관리하지 못하고 의료기관이나 의사들 사이에 '관행수가'라는 것이 있어 진료비 전액을 환자가 부담하는 공급자와 소비자 중심의 자율의료정책(의료1.0) 체제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77년 박정희 유신정부에 의한 의료보험 도입부터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이 되기까지, 국가가 의료를 통제하는 큰 정부 의료정책(의료2.0)으로 진행됐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1999년 12월 의약분업이 실시되면서 의료관리학이라는 패러다임이 국내에 대두됐고 현재까지 한국의 의료체계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의료생산체계의 소유와 통제가 의사로부터 자본가에게 넘어가고 제약자본이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함께 이해해야 하겠으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본다면 큰 정부의 수정자본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료의 본질’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 보면, 의료를 비용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큰 정부가 오히려 경제적 개념과 깊숙히 관계되어 국민의 건강권을 위한 정책적 수립에 한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료 2.0은 저비용 고효율의 기치 아래 돈을 최대한 적게 들여 국민의 건강을 지켜내려 노력하기 때문에 환자에게 비용 때문에 제한된 치료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최선의 치료를 하는 것이 의료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의 인식과 상반되는 것으로 둘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만 한다. 
 
국가가 인구 고령화와 첨단화 되는 의료기술로 인해 치솟는 의료비를 그대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상의 진료와 지속 가능한 의료정책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국민의 건강권이라는 고유한 가치와 비용이라는 시장개념 사이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위해선 전문가 단체가 적극 참여해야 한다. 만약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국민 혹은 의료인의 희생이 동반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료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서야 한다. ‘자본주의3.0’의 실패를 교훈삼아 ‘의료3.0’은 의사들이나 의료생산체계를 소유한 자본가, 혹은 제약자본이 중심이 되는 의료정책을 지향해선 안 될 것이다. 결국 소수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가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의료라는 공익적 성격 때문에 공급자 중심의 정책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보험자 중심의 정책(의료 2.0)이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비용 관리에만 치우쳐 의료전문성의 부재와 함께 생산적이며 본질적인 해결책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의료3.0은 국가와 의료인들로 구성된 전문가 단체, 그리고 수요자인 시민단체가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소통하고 화합해 여러 직역이 함께 어우러 질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의료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단체가 국가에 좋은 정책들을 제안해 함께 고민하고 시민단체와 함께 검토해 서로에게 좋은 의료 환경을 만들어 가는데 힘써야 한다.
 
이번 세월호 사태 직후 의료계는 자발적으로 Acute stress disorder와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대한 지원체계를 고민하여 지역사회와 중앙행정부처에 제안하고 의료심리지원단을 만들어 운영했다. 또한 한발 더 나아가 PTSD센터와 재난센터를 안산에 건립하도록 국가에 제안해 재난 시 총체적인 지원 및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민관이 협조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예가 의료3.0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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