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저수가와 환자안전

이재호
환자안전연구회
홍보이사
울산의대
응급의학과 교수
지난 3월 의사협회가 의정합의를 받아들여 파업을 유보하면서 올초 의료계의 가장 큰 이슈가 조금은 사그라든 듯하다. 다만 의정합의 결과를 보면 파업의 주요 이슈였던 '원격의료'나 '의료영리화'보다는 의료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건강보험수가와 관련된 부분의 합의가 돋보인다.

파업의 촉발제는 '원격의료'나 '의료영리화'였지만 근본원인은 저수가였던 것 같다. 의료계의 '공공의 적'인 저수가문제가 합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흔히들 우리나라 의료수가는 원가의 80%라고 한다. 물론 정부의 발표는 이보다 훨씬 웃돈다. 평균이 80%라는 것인데, 결국 의료기관이나 의사들은 원가를 보전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비급여나 수가가 100% 이상되는 치료를 선택하거나 사용되는 비품을 줄이거나 재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 위내시경검사 수가가 원가의 50% 정도라는 기사가 있었는데, 이를 예로 들면, 위내시경검사를 위한 필수단계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하고, 필요한 인력의 질을 낮추거나 감축하고, 비급여 항목을 늘리고, 재료를 재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위내시경 원가를 보전한다는 말이 된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나 제공받는 사람 모두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는 저수가체계를 통해 의료비의 상승을 막고자 하지만 의료현장은 점점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생명을 다루는 주요과들이 비인기과로 몰락하는 원인 중엔 저수가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수가는 환자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재사용이 금지된 기구의 재사용은 환자에게 감염을 비롯한 다른 위해를 주게 된다.

의료 서비스 인력의 감축이나 질의 하락 역시 환자안전에 위협이 된다. 좋은 시설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 못한 시설은 환자의 결과에 악영향을 끼친다. 환자 치료를 위한 인력이나 시설 등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를 받음으로써 제공될 수 있다.

3차 진료기관에 허용된 선택진료비나 부대사업 등은 이런 저수가체제 하에서 의료기관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가를 보전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놓았던 것인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의료영리화'의 경우, 영리를 추구하는 의료기관의 개설 이슈도 있지만 기존에 허용된 부대사업을 더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이슈도 포함돼 있다.

결국 본연의 의료 서비스가 아닌 다른 이윤이 남는 곳에 투자하고 집중해야지만 의료기관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킴으로써 더 나은 보상을 받는 시스템이 돼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의료기관의 재정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저수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댓가를 받고 다시 서비스를 제공하는 순환고리를 망침으로써 의료 서비스 제공체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불돼야 왜곡된 의료현장이 제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수가를 한순간에 해결할 묘안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어느 누가 어제 아침에 8000원 하던 이발비용이 가시적으로 좋아진 것도 없으면서 1만원으로 올랐다고 하면 좋아하겠는가? 의료보험료는 올랐지만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는 전혀 나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을 환자가 이해하고 동의하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이런 정책을 펼치는 것도 홍보하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은 의료 보험료와 의료비가 올라가는 것을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저수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왜곡된 의료현장이 제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희생양은 의료 서비스체계, 의료기관, 보건의료종사자, 그리고 환자들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미국의 경우, 최근 비용을 줄이면서도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의 질도 환자의 평가를 중요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환자들도 보다 환자중심적이고 환자가 존중되는 의료 서비스를 원하고 있다. 의료 서비스 제공자 관점에서의 효율이나 질이 아니라 환자 관점에서의 효율과 질을 요구하고 있다.

저수가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환자중심적인 서비스가 저절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생략되고 결핍된, 때론 위험한 서비스들이 제공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