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형 적용에 초점

 


“진료지침(가이드라인)은 진료를 시작하는 의사들이 환자에게 쉽게 접근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진료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반적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됐다. 진료지침에 들어있는 권고안은 개별 환자의 다양한 특성을 고려해 임상적 결정을 내리는 의사의 판단에 우선할 수 없다. 환자에 따라 개별화된 의사의 판단에 반대하는 기준의 근거로서 지침을 남용하거나 획일화된 임상적 판단을 강요하는 것은 지침의 작성 목적에 위배된다.”
- 2013 대한고혈압학회 고혈압 진료지침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의 홍수다. 특히 심혈관질환으로 인한 사회·국가적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전세계적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가운데, 고혈압·이상지질혈증·고혈당·비만 등을 포함해 지난 한해 국내외에서 발표된 관련 가이드라인만 수십개에 이른다. 시간과의 싸움에 쫓기는 임상의들이 이들 모두를 섭렵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 가이드라인을 손에 들었다 해도, 길잡이 역할을 해줘야 할 권고안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내며 오히려 임상현장의 혼선에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2013~2014년 사이 국내외에서 심혈관질환과 관련해 발표된 진료 로드맵들은 본지가 파악한 것만 10개 정도에 육박한다. ‘미국임상내분비학회(AACE) 고혈당 종합관리 가이드라인’, ‘유럽심장학회(ESC)·고혈압학회(ESH) 고혈압 관리 가이드라인’, ‘ESC·유럽당뇨병학회(EASD) 당뇨병, 당뇨병전단계, 심혈관질환 가이드라인’, ‘대한고혈압학회(KSH) 고혈압 진료지침’, ‘대한당뇨병학회(KDA) 당뇨병 진료지침’, ‘미국심장학회(ACC)·심장협회(AHA) 콜레스테롤 가이드라인’, ‘미국 JNC 8차 고혈압 가이드라인’, ‘ACC·AHA 비만 가이드라인’, ‘미국당뇨병학회(ADA) 고혈당 가이드라인’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심장학계의 가이드라인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은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다. 인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임상연구에서 과학적 통계기법으로 유의성이 검증된 치료전략을 임상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말 일괄 발표된 미국발 콜레스테롤과 혈압 가이드라인은 철저한 근거 중심의 권고안을 제시하고 있다. 권고안의 근거로 무작위·대조군 임상연구(RCT)와 RCT에 대한 메타분석에 초점을 맞추는 등 근거중심의학의 개념이 역대 최고로 힘을 발휘했다.

이에 반해 국내 학회들은 RCT 만을 기반으로 한 권고안은 매우 제한적이고 진료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박정배 대한고혈압학회 학술이사(관동의대 제일병원 심혈관내과)는 2013 대한고혈압학회 고혈압 진료지침과 관련해 “임상연구 뿐만 아니라 관찰연구 등 국내에서 발표된 중요한 데이터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환자의 특성과 의사의 판단에 따라 맞춤형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며 보다 유동적이고 전방위적인 권고안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고혈압 가이드라인 - 베타차단제의 선택
미국의 2013년 JNC 8차 고혈압 가이드라인은 항고혈압제의 1차선택과 관련해 티아지드계 이뇨제, 칼슘길항제(CCB), 안지오텐신전환효소억제제(ACEI), 안지오텐신수용체차단제(ARB) 중 하나로 치료를 시작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베타차단제(BB)가 제외된 것이 특징인데, 그 근거로 LIFE 임상연구를 들고 있다. ARB와 비교해 심혈관 원인 사망·심근경색증·뇌졸중의 복합빈도가 높았으며, 이는 뇌졸중 위험증가에서 주로 기인했다는 것.

하지만 앞서 발표된 유럽과 우리나라의 고혈압 가이드라인은 베타차단제를 1차선택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고혈압학회 진료지침위원회 위원인 편욱범 교수(이대목동병원 순환기내과)는 “미국에서는 약효에 대한 RCT 근거가 없어 베타차단제를 1차선택에서 뺐다고 주장하지만, RCT가 없더라도 충분한 여타 근거가 있다는 것이 유럽측의 주장”이라며 “미국 가이드라인에서도 베타차단제가 1차약제에서만 빠졌을 뿐 여전히 고혈압 환자의 치료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정배 교수 역시 “베타차단제의 뇌졸중 예방효과가 다른 약에 비해 절반 정도이고 당뇨병 위험이 높기는 하지만 심계항진, 두통, 불안증 등을 동반한 고혈압 환자에서는 베타차단제를 필요로 한다”며 “협심증 등 허혈성 심질환을 동반한 고혈압 환자도 있기 때문에 1차약제로 남겨 둬 의사의 판단 폭을 넓게 했다”고 설명했다. 유럽 가이드라인도 베타차단제의 1차선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대 이해영 교수(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는 이에 대해 “대사적으로 개선된 효과를 가지는 네비볼롤(nebivolol), 카베딜롤(carvedilol) 등 신세대 베타차단제들이 구세대를 대체하고 있어 과거 거론된 문제점이 해결됐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밝혔다.

콜레스테롤 가이드라인
미국이 지난해 선보인 콜레스테롤 가이드라인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동맥경화성 심혈관질환(ASCVD)의 1·2차예방을 위한 LDL-C 또는 비HDL-C 목표치를 권고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RCT 데이터 상으로는 70mg/dL 또는 100mg/dL 미만과 같은 목표치를 두고 치료했을 때 심혈관질환 예방효과가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심혈관질환 예방효과를 입증한 RCT들이 특정 지질 목표치를 시험 대상으로 둔 것이 아니라 스타틴과 위약 또는 스타틴 집중요법과 표준요법을 비교·검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은 또 지질치료 시에 ‘Lowest is best’ 접근법에 대해서도 “ASCVD 위험감소의 정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중 약물요법으로 인한 잠재적 부작용 위험이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채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의대 김효수 교수(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는 “LDL-C 조절의 ‘The lower, the better’ 개념이 현재 생물학적 근거는 있지만, 대규모 임상연구를 통해 지지된 근거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모든 약물이 임상연구 근거를 구축할 수 없는 현실적인 사정도 있다. 견고한 생물학적 근거가 있다면 임상근거가 없다고 해서 이를 무용하다고 도외시할 수는 없다. 임상근거를 구축하기 힘든 경우에는 의사의 생물학적 지식과 임상경험을 기반으로 의술을 적용할 수도 있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현재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가 새로운 한국형 콜레스테롤 가이드라인을 준비 중인데, 이와 관련해 어떤 입장을 표할지 주목된다.

고혈당 가이드라인
올해 초 발표된 ADA의 고혈당 가이드라인은 목표혈당에 대한 1차약물 치료전략으로 여전히 메트포르민 단독요법을 꼽고 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가이드라인에서 메트포르민은 내당능장애(IGT), 체질량지수(BMI) 35kg/㎡ 초과, 60세 미만, 임신성 당뇨병 병력 등이 있는 이들에 대한 1차 예방전략 약물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새롭게 개정·발표된 대한당뇨병학회의 당뇨병 진료지침은 “메트포르민이 대부분의 환자에서 혈당조절과 내인성 면에서 긍정적인 약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부작용이 없지는 않다”며 단독요법 알고리듬에서 메트포르민, 설포닐우레아, 알파-글루코시다제 억제제, 티아졸리딘디온, 메글리니타이드, DPP-4 억제제, GLP-1 수용체 작용제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아직도 비비만형 당뇨병이 서구에 비해 높고 유전·환경적 요인에 의해 인슐린 분비능이 떨어지는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유병특성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메트포르민·설포닐우레아·로시글리타존 등의 1차치료 효과를 비교한 PEAM 연구 등을 반영한 결과다. 당뇨병 환자의 지질치료에 있어서도 스타틴에 더해 여타 약제의 추가를 권고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종합적인 관리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개정판의 진료지침제정위원회를 이끌었던 가톨릭의대 안유배 교수(성빈센트병원 내분비내과)는 이에 대해 “이번 진료지침의 알고리듬 구성은 AACE가 근거에 따라 약물의 선호도를 제시한 것과는 다르게 선호도를 제시하지는 않았다”며 “약물 및 치료전략에 대해서는 임상의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것”이라며 환자특성과 의사판단에 따른 맞춤형 치료의 적용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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