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서 죽음에 대한 개념은 개인 또는 조상의 죄에 대한 신의 벌로서 또는 악마의 유혹에 의해서 병이 생기고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으로 고통 받고 죽음이 다가와도 그것을 겁내지 않고 저주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이를 맞이하였다.
 이런 죽음에 대한 개념은 과학적인 생각과는 반대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의학은 생사를 주도할 만큼 발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종교에 의해서 심판되는 형식으로 죽음이 선고되었다.
 즉, 르네상스 이전에는 크리스트 교회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과학적인 사고를 주장한다는 것은 악마의 주장이었으며 악마의 편으로 몰아세웠다.
따라서 사람들이 죽음과 대처하는 것은 오로지 부활과 영생의 믿음만이 유일한 길이었으며 죽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된 미술작품이 마카브르(macabre)라 하여 부패된 시체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죽음은 죄의 징표이며 썩어가는 시체는 죄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부패된 시체를 그리고 조각하는 것을 신 앞에 자기가 지은 죄를 겸허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여겼다.
부활 즉 새로운 삶을 위한 행진은 고무적이다. 그래서 삶을 위한 의지와 죽음이 함축성 있게 극복되기를 바라며 만들어낸 것이 마카브르이다.
 마카브르는 죽어야할 생을 마치고 다시 살아나려는 인간의 다양한 심성의 역사를 나타내는 상징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중세의 유명한 화가들은 앞을 다투어 마카브르를 작품으로 남겨 납골당이나 묘지의 예배당의 벽화로 장식하였으며 고관대작이나 부호들은 석관에 자기의 썩어가는 모습을 조각하게 하여 무덤을 장식하는 한편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신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표시로 삼았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과거 수도원이나 공동묘지의 벽에 그려지던 마카브르가 높은 담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침실까지 침투하게 된다. 하지만 시체는 더 이상 마카브르가 아니라 산뜻하게 썩은 해골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진짜 해골을 구하여 방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를 바니타스(vanitas)라고 하였는데, 이전과는 죽음의 개념이 달라졌다.
즉 중세의 마카브르는 대개 `회개`의 상징이거나 신의 명령을 받고 형을 집행하는 죽음의 사자였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바니타스는 더 이상 무시무시한 `죽음의 사자`의 상징이 아니며, 바니타스는 글자 그대로 옮기면 `덧없다`는 뜻이다. 즉 바로크 시대의 바니타스 속의 해골은 `죽음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 두려움 없이 그것을 몸에 걸치고 다니기까지 했던 것으로 그 무시무시한 `죽음의 사자`가 한낱 `덧없음`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바니타스를 몸에 간직하고 다니기 위해 문신으로 한 것이 그림 1이며 이것을 세련되게 도상화한 것이 그림 2이고 이를 사람의 해골 대신 동물의 해골로 표시한 것이 그림 3이다.



화가 푸르트나겔(Lukas Furtnagel)의 작품 `브르크라이어 부부`(1529)라는 그림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바니타스의 상징이라고 볼만한 것이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이 쥐고 있는 거울이 바로 바니타스의 상징이다<그림 4>.
 비치는 거울 안을 들여다보면 희미하게 두 개의 두개골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바니타스의 상징으로서 거울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을 뽐내며 제 몸을 비추어 보지만, 거울은 이미 썩어 벌레들의 안식처가 된 그녀의 얼굴만을 비추어 줄 뿐이다.
 그림 5는 거울 속의 바니타스를 상상해서 그린 기푸슨의 바니타스 그림이다. 이 그림을 거울 속에 있는 바니타스로 생각하고 보면 납득이 빠를 것이다.
 이 작품을 이전 초상화와 비교해 보면 작은 변화가 눈에 띤다. 즉, 죽음은 삶의 뒷면에서 삶의 내면으로 자리를 옮겨 이제 죽음은 삶의 본질로 된 것이다. 이 그림 속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즉, 두 부부가 존재하는 현실의 세계, 그리고 그들을 반영하는 상에 있는 거울 속의 세계로, 작가가 뜻하는 것은 현실은 덧없는 가상적인 세계이며, 거울에 비친 그 두개골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이라고, 거짓말을 못하는 거울이 삶의 본질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것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모방하여 문신으로 옮긴 것이 그림 6이다. 아마도 이 문신의 제작자는 푸르트나겔의 바니타스 그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문신을 시술받는 사람에게 분명히 설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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