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적 위암치료 새길 연 仁峯 김진복박사

위암수술 1만5천례 돌파 그날까지

지난 5월 5일 점심시간, 한 식당에 8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에는 서울의대 명예교수인 주근원 박사를 비롯, 내로라하는 저명인사 등과 퇴역장성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인제의대 백중앙의료원장이자 한국위암센터 소장인 인봉(仁峯) 김진복 박사가 초청한 식사모임이었다.

칠순을 맞은 김박사가 축하를 받아야 할 생일잔치 대신 자신이 집도한 위암수술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 점심 접대를 한 주객이 바뀐 것 같은 좀처럼 보기 힘든 모임이었다.

김박사는 그들에게 오래 살아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들이 있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칠순잔치를 마다하고 마련한 자리. 위암정복이 그의 외길 인생임을 확인하게 해준 뜻깊고 흐뭇한 자리였다.

"저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있기에 수술을 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4∼5년 간은 더 해야 할 것 같고 해낼 수 있습니다."

"거기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환자가 있어 메스를 든다는 그에게는 외과의사 환갑이면 손이 떨려 수술을 못한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칠순을 맞았지만 그의 의욕과 기력은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욕심이라고들 하지만 김박사는 개의치 않는다.

서울의대 조교수 시절이던 지난 1971년부터 31년간 집도한 위암 수술환자가 작년 말 현재 1만3,135례.

이미 세계 최다 기록을 세웠지만 1만5,000례를 달성하기 전에는 칼을 놓지 않을 각오다.

이 목표를 위해 하루 1명 이상, 연간 400례를 집도할 계획이다.


美 학술대회 "화제의 인물" 토론

김박사가 서울의대 교수 정년퇴임을 하던 해인 98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일반외과 학술대회에서는 "김진복, 그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그의 논문과 수술사례를 분석하고 그가 주창한 "면역·화학·수술요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한국인 의학자를 주제로 한 미국 유수 의과대학의 토론. 그것은 그의 지명도가 이미 세계적임을 새삼 증명하는 행사였다.

"한국의학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을 평생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보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3가지입니다."

김박사의 업적은 국내외적으로 적지 않다.

그 중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3가지. 76년경 항암 화학요법을 할 때 인체의 면역기능이 떨어져 반드시 면역요법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 이를 수술요법에 본격 도입하고 83년 면역·화학·수술요법을 창안, 보편화 한 것이다.

이 요법은 위암은 물론 유방암, 대장암, 폐암 등 거의 모든 암에 적용, 수술성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 돼 있던 "대장전방위소장문합술"보다 자신이 개발한 "대장후방위소장문합술"이 소화기능을 향상시켜 회복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과 위를 완전히 떼낸 후 식도와 소장을 잇는 방법을 창안, 국제학회에서 "킴스 타이"로 명명되는 등 세계학계가 인정을 하고 있다.


국제무대 대한민국의학 선양

그의 국제적 활동이 얼마나 활발한지는 국제위암학회장(99∼2002), 아태암학회장(85∼87), 아태임상종양학회장(현재)을 비롯 국제암학회·협회(UICC) 이사 및 인사위원, 국제소화기외과학회 이사, 아시아외과학회 이사 등 외과 및 위암관련 국제학술단체의 중추적인 직위를 두루 겸직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위해 66년 이후 해외학술여행을 130여 회나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80∼92년까지 정회원이었던 미국외과학술원(FACS)으로부터 Hon. FACC학위를 수여(93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학위는 당시 세계 전 외과계 학자 95명, 일반외과의학자 20명만이 수여 받음으로써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외과의학자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세계 외과계 의학자가 40여명 및 5명만이 가입돼 있는 미국외과학회(ASA) 명예회원(90∼93년)과 일본외과학회 명예회원(97년)이기도 하다.

그리고 94년 국제암협회(UICC), 96년 세계보건기구 국제위암심포지엄과 곧바로 개최된제15차 세계소화기외과학회 학술대회, 99년의 제3회 국제위암학술대회, 제8차 아태 암학술대회, 제2차 동아시아 소화기외과학회 등 큼직한 국제학회를 한국에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치루는 데도 앞장을 섰다.


"검사와 여선생" 읽고 한때 법관 꿈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제천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김박사는 사교성이 적지만 의협심이 강하고 "積善"이란 가훈에 따라 남을 위하는 일에는 솔선수범하는 학생으로 자라났다.
 
중학생시절 "검사와 여선생"이란 소설을 읽고 법관이 되기를 꿈꿨다. 독일유학을 위해 독일어공부에 주력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무렵 부모님들이 의사가 되기를 권했다.

법관으로 억울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지만 정직한 그의 성품에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을 돕는 의사가 제격이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52년 서울의대에 입학, 초·중·고에 이어 58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의대 본과 3학년 때 일입니다. 고인이 되신 전승관 교수님의 "한국인 위암"에 대한 대한외과학회 숙제보고서 작성을 도와드리면서 위암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됐죠."

서울의대 본과 3학년 때 위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미 외과에 흥미를 갖고 있던 터였다.

내과계열은 투약하고 경과를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과 달리 외과는 한번의 수술로 치유를 좌우한다는 점에 더욱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서 위암이 가장 많고 문제가 된다는 현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서울수도통합병원에서 수련과정을 마친 그는 63년 외래강사로 서울의대와 인연을 맺고 제대 후 66년 전임강사로 본격적인 교직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미국 보스톤의대병원 레지던트 및 펠로우(69∼70), 하버드의대(70∼71) 펠로우 등 외과유학을 다녀왔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 슬론케터링 암센터, 영국 버밍험의대 등 단기연수를 하면서 외과종양학의 연수에 진력, 지금껏 위암정복의 꿈을 실현하는데 50년 가까운 의사생활을 소홀하지 않고 있다.


"작은 술기가 수술결과 판가름"

"외과의사는 완벽한 수술을 위해 어느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제자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수술이든 결코 큰 술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주 작고 세세한 술기에 의해 그 결과가 판가름난다는 것입니다."

김박사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이듯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수술 역시 100점짜리 수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감을, 자신이 수술실에 들어서면서 되새기는 외과의사로서의 철학이자 후배 외과의사들에게 해주는 충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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