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짜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가장 잘 알는 의료인들도 때로는 약물 오남용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국내에서 연구된 것은 거의 없지만 미국 연구를 보면 의사들의 약물 오남용 빈도는 일반인과 유사하거나 약간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의사들 가운데 마약류 진통제나 벤조디아제핀과 같은 약제 사용 빈도가 일반인보다 5배 높은 것으로 미뤄봤을 때 밝혀지지 않은 처방 약제 남용 비율을 합하면 예상보다 더 높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처방 약제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플로리다대 Lisa J. Merlo 교수팀이 최근 약물 관련 손상으로 의사 모니터링 프로그램에 등록된 의사 55명을 대상으로 토론한 결과를 종합해 Journal of Addiction Medicin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처방약 오남용 이유를 △신체적 통증 관리 △감정적·정신적 디스트레스 관리 △스트레스적인 상황 관리 △기분전환용 목적 △금단증상 회피 등 크게 5가지로 요약했다.

모니터링 대상자의 평균 53세로 남성이 대다수였고(94.5%), 백인이 71.7%로 가장 많았다. 대상자 분포는 전공하는 과목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가정의학과(21.8%)와 일반내과 또는 내과분과 전문의(16.4%), 마취통증의학과(14.5%), 정신의학과(14.5%), 산부인과(10.9%) 등 5개 과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번 연구의 대상자들은 모두 물질의존증 진단을 받았는데, 그 중 38명(69.1%)이 처방약을 오남용한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는 알코올 또는 불법 약물만 오남용한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처방약을 오남용한 대상자는 모두 알코올 또는 불법 약물 사용 경험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불법 약물은 대개 마리화나와 코카인, 환각제 등이 사용됐고, 처방약은 아편제와 진정제(sedatives), 각성제(stimulants)가 오남용됐다.

자가 처방으로 약물을 남용한 의사 중 상당수는 통증 관리 등 치료 목적으로 약물 사용을 시작했다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연구에 참여한 한 의사는 자신에게 약물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신들의 음료(Soma)같은 역할을 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처음엔 요통을 관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약물을 처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엔 아픈 아들을 돌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약물을 사용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외상 수술로 인한 통증 관리를 위해 퍼코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또다른 의사는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들어 나중엔 기회가 있을때마다 약물을 사용하게 됐다고 했다.

근관(root canal) 통증을 줄이기 위해 하이드로코돈을 복용했던 의사는 이 때의 황홀감을 잊을 수 없어 의료과오소송이나 경제적 문제 등 스트레스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단지 기분전환용으로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경우도 꽤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다른 물질의 효과를 증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복용했다. 한 의사는 "바이코딘 약간과 알코올을 함께 복용하면 확실히 기분이 매우 좋았다"면서 "그렇게 마시면 하루밤새 한 병을 다 마시지 않아도 돼 술 마시는 약이 줄었다"고 말했다.

약물을 섞어 복용한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물과 아편제를 함께 사용하는 식이었다. 술을 마시며 코카인을 사용해 기분을 한층 높이고, 이를 다시 진정시키기 위해 벤조디아제핀을 복용한 의사도 있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는 자가 처방과 기분전환용 사용이 의사들의 약물 오남용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면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의사 트레이닝 기간뿐 아니라 커리어 기간 내내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에 앞서 대한의사협회지 9월호에 게재된 '의료 환경과 의사의 약물 오남용: 현황 및 문제점'에서 경북의대 박성식 교수는 "막상 자신의 약물 남용과 관련된 증상을 알더라도 의사들은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약물 오남용은 분명한 하나의 질환으로서 자신과 가족들에 대해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치료하고 있는 환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이의 예방과 조기 발견, 처치 및 재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의 약물 오남용은 개인의 성격이나 동반질환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초래될 수 있으나 과도한 업무와 연관된 스트레스로 인한 허탈 현상 또한 중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따라서 예방을 위해 개개인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들의 근무환경의 변화나 의료전달체계의 변화를 통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제언했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