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의사면허제도 속엔 국가 의료철학 담겨 있어
의사 스스로 제도 수립에 적극 참여해 공감 얻어야


지난 7일 저녁 대한의사협회 3층 회의실에서는 의료윤리연구회(회장 홍성수)의 연구모임이 열렸다. 의사면허제도라는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첫 시간이었다. 이날 강의를 맡은 고려의대 의인문학교실 한희진 교수는 첫 강의를 '의사면허제도의 역사와 철학'으로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의철학(醫哲學, Philosophy of Medicine)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위고학술상(Prix Hugot)을 받은 만큼 그의 강의는 프랑스에서의 의사면허제도와 그 철학적 배경을 위주로 이뤄졌다. 한 교수는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국가의 면허제도는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차이가 있다. 국가철학 자체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제도에 담겨있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라며 강의를 시작했다. 이날 연구모임의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면허제도의 역사와 철학'이라는 주제부터 매우 어렵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의(Medicine, 醫)'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여기서 의학, 의료가 아닌 '의'라고 하는 이유는 '의'가 과학과 지식으로서의 '의학(Medical Science)', 기술과 술기로서의 '의술(Medical Technology)', 개인과 사회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의료(Medical Practice)'가 복합·융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개념은 지식으로서의 의, 권력으로서의 의, 생산품으로서의 의, 수혜자들에게 일종의 의무로서 수행되는 의 등 매우 다양하다. 이는 의를 바라보는 지평에 따라서 과학적 개념, 사회문화적 개념, 경제적 개념 등으로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 '의'는 건강·질병이라는 가치 판단의 전제 위에 수립된 가치지향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다른 과학들과 달리 시대·지역에 맞는 윤리, 정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입돼 규정되고 제도로 발전된다.

유럽에서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의 개념은 프랑스의 의사이자 의철학자였던 카바니스(P.-J.-G. Cabanis, 1757~1808)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학·가치론'으로서의 인식이다. 그는 의를 자연과학(생명과학, 기초의학)으로서 뿐 아니라 임상의학(실천론), 윤리학(가치론)과 인문학(사회과학), 문학·역사·철학(의인문학)이 융합된 개념으로 확장시켰고, 이에 따르면 의사는 의료를 베푸는 차원을 뛰어넘어서 경제적, 사회적, 법적, 윤리적 문제까지도 담당해야 하는 임무를 갖게 되는 것이다.

- ‘의’의 개념 안에 이미 윤리적 가치가 개입돼 있다는 말인가. 의학을 자연과학으로 인식하고 근거중심의학의 패러다임으로 보아왔다면 의아할 것 같다.

그렇다. 각각의 과학에는 그 과학만의 고유한 근거가 있다는 전제하에 의학은 의학만의 고유한 과학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자 노력해 왔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지역에 따라 의학이 과학이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다양하게 변화해 왔는데, 근거중심의학은 의학이 과학으로 인정받기 위해 갖춰야 할 현대적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과학을 넘어서는 다양한 가치들이 개입하지 않고는 어떤 지식과 기술도 성립하기 어렵다는 의철학과 의사학(醫史學)의 연구성과가 생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의사교육이 의학지식과 술기능력 위주로 이뤄지고 있고, 이 때문에 의학 자체가 이미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개념 정의가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 각계에서 교양 프로그램으로 인문학 강의가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교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교양은 시민의 필수적인 지식과 덕목으로서 선택이나 취미가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의'가 인문학·사회과학적 개념이 포함된 것이라면 더더욱이나 의사에게 인문학적 교양은 필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의사면허 취득 및 유지 조건에 윤리의식·직업윤리 등을 포함한 인문학적 교양이 들어가있지 않고,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미흡한 수준이다. 적어도 프랑스의 기준에서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의사는 의대, 전공의 시절 이러한 인문학적 교양을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면허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기초·임상의학의 필수 과목을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의사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교양이 필수적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의사교육은 아직까지 직업교육적 측면이 강하다. 국가면허시험 자체, 취득 이후의 교육과정에도 인문학·사회과학적 덕목들이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면허제도로 넘어왔다. 면허제도가 왜 시작된건가?

면허제도의 역사는 곧 전문직(Profession)의 역사다. 전문직의 역사를 살펴보면 왜 면허제도가 필요하게 됐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직의 역사는 중세시대 기능인 조합인 '길드(Guild)'와 밀접하다. 길드는 같은 직업군끼리 상부상조하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서 규범을 만들고 자율규제를 엄격하게 실천하던 조직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면서 안정적인 직업환경도 추구했다. 그러나 길드가 적정한 교육을 통한 숙련된 인력을 양성하는 장점도 있었던 반면 전문지식의 전수를 차단하려는 독점적 경향과 가격 담합, 나아가 부정적 의미의 엘리트주의 등의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오늘날에도 길드적 특성을 가장 강력하게 유지하는 전문직업군이다. 자유경쟁의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갖고 있으면서 보편적 서비스 제공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이뤄지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전문직업군은 근대 시민 국가 형성의 주축이 됐으며, 고등고육을 받은 고소득 계층으로서 다양한 특권을 행사해왔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선도적 가치를 창출해 왔다는 점이다. 전문직이 국가, 사회,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윤리적이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엄격한 직업윤리를 갖추고 철저하게 자율규제를 하는 전문직업성(Professionalism), 즉 직업가치관이 정립돼야만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미국의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정도로 의사전문직의 직업윤리가 합리적으로 수립돼 있고 또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우리의 전통과 규범이 반영된 고유한 의사 전문직업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 프랑스의 의사면허제도에 대해 좀 더 설명해달라.

전문직과 전문직업성의 역사를 추적해 가다보면 프랑스식 제도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결과로서의 프랑스식 제도를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의 전통과 규범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도 않다. 하지만 프랑스 의료계가 그런 제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겪었고 그 제도에는 어떠한 철학이 담겨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결과는 다르겠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제도가 어떠한 철학을 전제하고 추구하는지를 우리 스스로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 시민계급의 권리가 성장하면서 길드와 심각한 대립이 시작된다. 폐쇄적이고 특권적인 길드에 대한 비판이 증대되고 심지어 길드의 해체까지도 요구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프랑스에서 의사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의대교육에 대한 관리를 강화해 미래를 준비하고 윤리적 기준도 더욱 철저하게 정비했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의사의 역할이 기술적 차원을 넘어 경제, 사법, 윤리적 권한과 책임까지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분야를 강화했다. 앞서 언급했던 카바니스가 주장한 '의'의 개념이 바로 이렇게 나온 것이다. 프랑스는 의료를 공공재로 규정하고 국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이러다보니 국가가 '의'의 실천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의학연구의 발전을 보장하고 의료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과제가 됐다.

프랑스는 의대교육비를 국가가 지원하고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며 의료를 사실상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는 나라다. 무한경쟁시스템 속에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의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두 나라 모두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충분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의료환경을 발전시켜왔는데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의료환경은 미국식이면서 프랑스식 전국민 건강보험제도를 들여와 시행하고 있으니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수입된 제도의 근거가 되는 철학을 면밀히 검토하고 이 철학을 의료계는 물론 사회 전체가 과연 동의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의사면허제도는 어떤 철학을 담아야 할까?

제도는 반드시 실제 현장에 있는 전문가가 스스로 참여해 수립해나가야만 한다. 이 좋은 예가 프랑스의 제도 수립 과정이다. 프랑스의 경우 의사면허제도수립 과정에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설득하며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타 직종 보건의료인이나 대중과의 갈등을 줄일 수 있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의료제도와 면허제도는 철학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뤄진 바탕 위에 정착이 됐는데. 이 과정에 의료에 대해 의철학자들의 논의뿐 아니라 의료인들의 의견이 반드시 필요했고 실제로 이 의견의 많은 부분이 제도에 반영됐다. 서양에 비해 의사면허제도의 출발이 늦기는 했지만 앞으로 우리가 서양의 문물인 '의'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인 규정과 문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그 안에 어떤 권리와 의무를 담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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