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관리 절실

"2007~2011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민간인과 연합군 사망자 수와 같은 기간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 수 중 어떤 쪽이 더 많을까요? 대부분 전쟁 사망자를 꼽겠지만 정답은 자살 사망자입니다. 민간인과 연합군을 합해 이라크 전쟁 당시 사망자 수는 3만8625명이고 아프가니스탄은 1만4719명이지만 우리나라 자살 사망자 수는 7만1916명으로 전쟁 사망자의 2~5배 수준입니다."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은 27일 '자살 예방을 위한 건강증진병원의 역할'을 주제로 제2회 건강증진병원 심포지엄을 열고 병원과 지역사회, 정부가 각각 자살 예방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어떤 지원이 있어야 하는지 논의했다.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문상준 사무관은 "우리나라 자살 문제가 전쟁보다 심각한 상황"이라 전하고 자살 예방의 장애 요인으로 △자살에 대한 미시적 원인 규명 미흡 △자살 고위험군 관리체계 미비 △자살예방 교육 컨텐츠 부재 △언론의 선정적인 자살 관련 보도 행태 및 자살에 대한 국민 인식 부족 △범부처 차원의 자살예방 대응 노력 부족 등 5가지를 꼽았다.

이를 위해 복지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3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우리나라 자살 실태를 조사하고 자살의 명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다.

문 사무관은 "심리적 부검을 도입, 경찰청과 연계를 통해 자살의 원인 및 일반인과 구별되는 특징을 규명하고, 응급실 기반 자살시도자 사후관리 사업과 연계해 자살 시도 원인을 조사하며 통계 자료를 활용해 자살 사망자들의 사회·경제적 실태, 관련 신체·정신 질환 및 의료이용 행태 분석 등을 통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자살예방대책을 수립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로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관리를 통해 자살 재시도를 방지하기 위한 지원체계를 구축한다. 문 사무관은 "올해는 25개 기관을 선정, 하반기부터 병원 당 5000만원을 지원하며 향후 전국적으로 더 많은 병원이 이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과제는 자살 고위험 노인 지원체계 구축이다. 향후 통합적 서비스 모형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으며, 현재 '보고 듣고 말하기' 프로그램을 통해 우선 노인복지서비스 제공자가 게이트 키퍼(Gate-keeper)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문 사무관은 "아직 우리나라는 자살 예방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사회 전반적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자살율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정부의 의지에도 여진히 지역사회의 자살예방사업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동작구정신건강증진센터 이지연 팀장은 "서울시는 고위험군 조기발견과 자살 시도자 위기 관리사업, 유가족 관리사업을 3대 사업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시도자와 유가족 발견이 쉽지 않고, 발견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등록돼 관리받는 비율이 적다"고 말했다.

발견 후 신체적 손상을 평가하려 해도 가능한 병원을 찾기 어려워 업무의 비효율성이 높고, 초기 접촉을 위한 공간 마련도 절실하다. 이 팀장은 "병원과 센터 간 업무 이해 및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필요하며 표준화된 개입 매뉴열과 평가 지침도 있어야 한다"면서 "자살 시도자 응급 개입 체계에 대한 정책적 지원 강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특히 "응급실은 자살 시도자 발견과 개입, 사후관리가 연결되는 첫 지점으로 인적·물적 자원 확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신응급 상담요원과 휴식공간 마련 필수

서울의대 홍기정 교수(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도 이에 동의하며 "응급의료센터가 보건소와 지방 정부, 정신보건센터, 119, 112, 자활 시설 등 여러 유관 기관 네트워크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면 한다"면서 "그러면 더 촘촘하게 자살 시도자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자살 시도로 응급실을 방문한 사람은 매우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의료진이 자살 시도자인지 물으면 이를 부정하고 그냥 돌아가버린다"고 말했다.

치료하는 의사와 상담하는 사람이 달라 연계가 어렵고, 상처 치료 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이 없는데다 자살 시도자들은 자신은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특히 정신과 진료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상처 치료만 받고 자의로 병원을 나선 뒤 자살을 재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홍 교수는 "만약 급성심근경색 환자가 응급실을 방문해 심혈관 조영술을 거부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지 않고 귀가했고, 퇴원 후에도 순환기내과 외래를 방문하지 않고 급성심근경색이 악화된 채 응급실을 방문해 사망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 소송에 휘말리고 윤리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라며 "그러나 사람들은 자살 시도자가 같은 상황에 처해 결국 사망했을 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했다.

또 "자살 시도자나 정신질환자의 응급 상황에 대한 시스템이 부재하고, 자살 환자의 응급실 방문 규모와 역학적 특성에 대한 자료도 전무하다"면서 2011년 6월 1일부터 2012년 4월 30일까지 11개월간 서울대병원과 보라매병원에서 운영한 정신응급 및 자살 조사 감시 체계를 소개했다.
홍 교수는 "분석 결과 두 기관을 합해 3일에 2명 꼴로 자살 시도자가 응급실을 방문했고, 그 중 자의로 퇴원하는 환자는 28.1%였다"며 "대상자 중 1/4은 과거 자살 계획이나 자살 기도 경험을 한 적이 잇고, 퇴원해서 다시 자살시도를 하겠다는 비율도 12.2%나 됐다"고 설명했다.

또 1, 3, 6개월 뒤 전화 추적 조사에서 퇴원 1개월 후 치료를 유지하고 있는 비율은 52.0%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 6개월 후에는 39.5%밖에 되지 않았다. 홍 교수는 "전화 설문에 응한 환자는 다소 협조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환자군에서도 절반만 치료를 계속 받고 있었다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홍 교수는 응급실에서 초기 응급 처치를 마친 뒤 전문 상담요원과 대면 상담을 통해 치료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지역사회 정신보건 프로그램과 연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기존의 간접 접촉 방식으로는 치료 동의율이 9.3%로 저조했지만 시간과 인력을 투자해 직접 접촉 방식을 적용하자 동의율이 71.4%로 훌쩍 증가했다"고 말했다.

보라매병원에서는 자살 시도자가 내원했을 때 응급의학과에서 신체적 치료와 안정화하는 시간을 가진 뒤 모두 사례 관리팀으로 의뢰해 적절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사례관리팀에서는 초기 평가를 하고 사례관리 대상자를 선정하며 정신건강의학과에 의뢰한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고,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는 단기 사례 관리를 받고 이를 마친 환자는 정신보건센터와 자살예방기관과 연계해 추가 지원을 받도록 한다.

이 때 상담 및 안정, 보호자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 기관과 연계해 사회 경제적 지원을 돕고, 퇴원 환자를 관리함으로써 조사 감시 체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신응급 전문 상담요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홍 교수는 "응급실 기반 관리를 위해서는 상담 요원 채용과 자살 시도자를 위한 휴식 공간 마련이 필수지만 개별 병원 차원에서 인력과 시설을 갖추긴 힘들며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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