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만 해도 글로벌 본사, 아태지역 본부만 나가더라도 항상 우리나라는 관심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루가 멀다하고 발전하는 중국에 자리를 내주고 우리는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곤 한다."

글로벌 의료기기기업들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한국 시장의 현실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불과 5년 전, 아니 3년 전만해도 글로벌 시장에서 대접을 받았지만, 이젠 찬밥신세라는 것이다.

과거 한국 의료시장은 유망했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고 새로운 제품을 도입하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의 실력도 뛰어났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일본에 비해 암치료기, 로봇수술기, PET 등의 새로운 기술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자연스럽게 한국은 글로벌기업들의 주목을 받았다. 끊임없이 글로벌기업이 국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시도했고, 대리점으로 진입하다 아예 본사 차원으로 지사가 생긴 경우도 많다. 한편으론 그만큼 무역수지 적자폭을 늘린 주범이었다. 장비 구입 과열 경쟁이라는 부정적인 이슈도 있었다.

A업체 관계자는 "아시아 지역에서 우리나라는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시장이 화려해 보였고 날이 갈수록 커졌다. 미국에서는 주(州 )당 하나 정도로 구입하던 PET-CT를 50개 이상의 모든 대학병원들이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면 전세계가 모두 놀라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기불황과 정책 환경 변화로 환자수가 줄고 병원의 수익도 줄어들면서 시장 환경이 불리해지고 있다. 비용절감 정책으로 인해 병원 재정이 열악해지자 덩달아 의료기기 기업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B업체 관계자는 "한국은 시장 규모 자체는 작지만,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테스트 마켓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장으로 인식돼왔다"며 "그러나 계속되는 보험재정의 압박과 병원들의 비용 절감으로 연쇄적으로 새로운 기술 도입을 꺼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C업체 관계자도 "병원들이 지난해 말부터 평균적으로 10~15% 환자가 줄었다고 하고 있다. 그만큼 10% 이상의 비용 절감이 최대 화두이기 때문에 새로운 의료기기 구입은 물론,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에 대해 소개하면 연구 목적용으로 기증하라는 요구가 대부분이고, 심지어 병원이 어렵다며 기부하라는 요청만 늘어나고 있다.

투자 유치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과도한 규제도 악재다. 현재 정부 차원으로 신의료기술 평가제도를 손보고 있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 보건의료연구원 등에서의 제품 허가심사 절차가 까다롭고 승인이 오래걸린다.

신의료기술 승인이 나더라도 재정적인 이유로 급여를 받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혹여 받더라도 전세계 수가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책정된다. 시장이 작은데 더 작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병원이 적극적으로 신의료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장이 커질리 없다는 관측이다.

사정이 이렇게되자 국내에 진입한 글로벌기업들이 위축되고 있다. 한 업체는 한국지사장의 자리가 없어지고 싱가포르와 합쳐졌다. 다른 업체도 아태지역본부에 흡수, 통합됐다. 한국 철수를 선언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이 생길까 불안해하는 업체도 늘어나고 있다.

반면 중국, 인도 등의 성장세는 거세다. 실제로 각종 시장보고서를 통해 10억명이 넘는 인구에 기반한 이들의 시장 파이 자체는 어마어마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본에 의해 영리병원이 운영되고 외국인 환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태국, 싱가포르의 성장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남은 시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한탄도 들렸다. 초음파 급여화에 이어 MRI, PET 등의 급여화도 오히려 성장 견인이 아닌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 적정수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고정수가로 책정되면서 저가 제품 위주로만 판매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의료진이 전세계 학회를 다니면서 신의료기술을 적극적으로 접하고, 전세계 각지의 병원으로 퍼져나가는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D업체 관계자는 "이대로 가다가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시장에 우리나라는 그저 하나의 작은 점 정도로 비춰질 것"이라며 "더이상 신제품이나 신기술이 한국 시장에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만큼 피해를 보는 것은 한국 의료진과 소비자"라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마냥 국산 제품을 키우기도 어렵다. 우수한 기술력을 따라잡기도 어렵지만, 당장 거대한 연구개발비에 투자하는 환경이 구축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 환경마저 위축되자 부정적인 전망만 가득하다.

업계는 "의료기기 수입사들이 무역수지 적자를 부추기고 국산 시장 자체를 빼앗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기술 도입을 가능하게 하고 글로벌 표준을 구축하도록 돕는 환경을 만들어왔다. 또한 고용 창출과 투자 유치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다"며 "글로벌기업 직원이기 이전에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일하고 있지만, 갈수록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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