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석 가톨릭의대 교수/부천성모병원 소화기내과





이영석
가톨릭의대 교수/부천성모병원 소화기내과

한국은 간질환 환자들이 매우 많은 나라다. B형간염 바이러스가 만연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만성 B형간염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질병 중에 하나로 꼽힌다. 거국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통해 젊은 연령층에서는 B형간염이 현저하게 감소했으나, 이미 만성 간염을 지닌 사람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간경변·간암의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어 적절한 치료대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B형간염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 B형간염은 주로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겪으면서 B형간염이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B형간염 바이러스의 실체가 발견되기도 전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국민들이 B형간염에 전염된 것이다.

② B형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약제가 없었을 당시에는 환자에 대한 치료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전염병 예방법을 근거로 환자의 사회활동과 권익을 제한함으로써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③ 우리나라에 만연된 B형간염 바이러스는 다른 나라와 달리 단일형의 유전자형(genotype)으로, 그것도 예후가 가장 나쁜 유전자 C형이다. 만성 간염에서 간경변증·간암으로 이행하는 비율이 높고, 항바이러스 치료도 어려운 유전자형이 우리나라에 만연돼 있는 상태다.

④ 우리나라는 제1세대 백신이나 유전자재조합 백신을 미국보다 1년 늦게 개발했으나,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백신 강국으로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⑤ 경구용 항바이러스제(lamivudine)가 개발됐을 당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약제의 사용 시기가 빨랐고, 장기간 사용함에 따라 약제내성 바이러스가 많이 출현했다. 약제내성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했고 잘못된 보험정책으로 인해 다약제 내성 환자가 많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만성 B형간염이란 B형간염이 오랜 기간 동안 진행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만성 간염 시기에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면 (대상성) 간경변증이 발생되고 이 시기에도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면 간의 기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 발생하는 비대상성 간경변증으로 이행한다. 간경변증 상태에서는 흔히 간암이 발생되어 만성 간염-간경변증-간암은 B형간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만성 B형간염을 질병초기에 치료한다는 것은 환자 개인이나 사회적, 국가적 측면에서 모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약제로 B형간염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해 염증을 완화시키고, 인체가 지닌 면역체계를 회복시켜 항체형성을 도모하며, 조직학적인 개선을 통해 생명연장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첫 단계가 바로 만성 간염 조기에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질병 초기에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지 못하고 간경변증에 도달해서야 치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만성 간염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어 간과하기 쉽고, 막상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려고 해도 보험정책의 장벽이 높아 좌절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만성 B형간염 환자에서 항바이러스 치료의 기준 중에 하나인 혈중 AST/ALT 농도의 경우 정상범위는 남녀에 따라 다르고, 환자의 상태 또는 검사기기에 따라 달라 외국에서는 정상의 2배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보험정책에서는 획일적으로 80 U/L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만성 B형간염 치료제가 없었던 지난 날 전염병예방법을 근거로 B형간염 환자의 사회적 권익을 제한하였던 슬픈 역사가 있다. 효과적인 치료약제와 치료방법이 보편화된 현재에는 B형간염 환자들이 질병초기에 치료를 시작할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춰 줄 필요가 있다. 단기적인 경제논리의 보험정책보다는 질병의 악화과정을 조기에 방지하고 생명연장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장기적인 안목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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