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Essay]

낙태는 엄연히 불법
국민도 의료계도 인식 달라졌는데
정부·입법부·사법부는 여전
더이상 피하지 말고 분명한 입장 밝혀야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임신 6주의 태아를 낙태해 부산지법에서 재판을 받던 조산사가 낸 낙태죄 위헌 소원에서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09년부터 낙태 근절 운동을 하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 모임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 대변인으로서 나는 당시 헌법 재판소에서 열린 낙태죄 공개 변론을 방청했다. 헌법 재판소 앞에선 여성 단체가 낙태 자유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등 열기가 가득했다.

피고 측 변호사는 낙태죄에 관한 형법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시대 착오적인 법이고 의사들이 불법이라고 낙태 안 해줘서 조산사가 '어려운 처지의 여성을 위해 낙태 해준 것'이니 죄가 없다는 취지의 변론을 펼쳤다. '여성을 위해 낙태를 해준다'는 소신을 가진 그 조산사가 낙태죄 합헌 판결 이후 지금도 소신껏 낙태를 하고 있는지 이제는 법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이 재판을 보며 든 의문이 있다. 조산사가 출산을 돕는 업무 범위를 벗어나 초기 낙태 수술인 소파술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했음에도 헌법재판정에서 당당하게 낙태죄의 위헌 주장을 펴는데 반해 그동안 낙태를 조산사보다 더 많이 해 온 수많은 의사들 중에는 법과 현실의 괴리를 고쳐야 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의사가 왜 한 명도 없는가 궁금했다.

지난 2010년 진오비에서 낙태 혐의로 고발한 세 병원 역시 모두 불법 낙태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 낙태법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다. 위헌 소원을 제기한 조산사 처럼 낙태가 여성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소신이 의사들은 없고 오로지 돈 때문에 불법 낙태를 해온 것인가?

낙태에 얽힌 문제들은 진료실에서 매일 낙태 환자를 만나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침묵해 온 것인가?

진오비는 이 부조리한 낙태 유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부터 의사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자정 노력을 하자고 동료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와 정부에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낙태 안 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낙태에 관해서는 무법 천지라 할만큼 엉망인 것은 의사들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 한심한 실태를 현장에서 매일 겪고 있는 의사들이 침묵하는 한 우리 사회는 낙태 문제에 눈 뜨지 못할 것이라는 자각으로 진오비는 낙태 근절 운동에 나섰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나?

산부인과는 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낙태 몇 건 한다는 게 수입이 좋다는 표현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자랑을 하지 않는다. 낙태하는 병원이 얼마나 줄었는지 파악하긴 힘들지만 공공연하게 낙태 환자를 유인하던 광고도 많이 줄었다.

2010년 정부에서 실시한 낙태 실태 조사에서 낙태 감소를 이끄는 사회적 요인으로 가임기 여성 중 70%가 낙태 병원 감소를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변했다. 예전엔 산부인과에서 낙태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 낙태 안 한다고 하면 당신 산부인과 의사 맞냐고 따지는 환자도 있었다.
결혼 전 임신은 말할것도 없고 기혼 부부도 피임의 한 방법처럼 반복 낙태하는 경우가 흔했다. 임신인줄 모르고 약 먹었다고 낙태하러 오고, 태아 이상이 발견되면 당연히 낙태해야 한다고 여겼고 기형이라는 이유로 낙태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이제는 국민들이 낙태는 불법이고 시술한 의사와 여성도 처벌받는다는 것을 안다. 예전에는 합법이었는데 진오비 때문에 낙태가 불법화된 줄 알고 항의하는 전화도 종종 받는다.

이렇게 의료계와 국민 인식은 변화하고 있는데 낙태 문제에 책임이 큰 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오비 활동 후 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 협의체를 만들었으나 한차례 캠페인 공모전을 한 것 외엔 이렇다 할 활동 소식이 없다.

입법부에서는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이 지난 18대 국회에서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대통령령에 의해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홍 의원이 판사 출신이며 보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 소속이고 더욱이 가톨릭 신자라는 점에서 도대체 우리나라는 낙태 문제에 보수, 진보의 철학도 없고 종교적 신념도 없으며 법조인도 법을 무시하는 한심한 형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낙태에 대한 법질서를 세워야 할 책임이 있는 사법부의 상황은 더 어이없다.

지난 6월 26일, 대전지법 제3 형사부 (정완 부장판사)는 405명의 태아를 낙태한 의사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검사의 항고를 기각하고 선고 유예와 형 면제를 판결한 원심 판단을 유지하며 "사실상 낙태가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상 피고인들에게만 무거운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회분위기상 용인되면 헌법 재판소가 합헌 판결을 내린 법을 무시하며 판결하는 게 판사의 역할인가?

이번 대전지법 판결은 불법 낙태하며 마음 졸이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전국의 낙태 사범들은 대전지법에서 재판을 받겠다거 나설 판이다. 한 건의 낙태로 부산지법에서 재판을 받은 조산사도 대전지법에서 재판을 받았더라면 형 면제로 풀려났을지 모르겠다.

판사도 원치않게 임신을 하면 낙태하러 산부인과에 온다. 그러나 재판관으로서 법 집행을 할때는 법대로 판결해야 한다. 판사도 무시하는 법을 누가 지키겠는가? 집행하지 않을 법이면 없애든가 아니면 법을 지키도록 국민을 계도하고 법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할 책임이 정부와 국회, 사법부에 있다.

진오비는 2010년 낙태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만들어 합리적 기준에 의해 처벌함으로써 법 질서 안에서 낙태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자고 대법원에 청원한바 있으나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무책임한 판결이 내려졌다.

낙태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정부와 국회, 사법부는 더 이상 낙태 문제를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국민 앞에 낙태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낙태하는 어느 여성도 행복하지 않다. 어느 의사도 낙태하기 위해 의사가 되지 않는다. 낙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진오비는 계속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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