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더운 여름을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수마 때문에 시원하다 못해 간담이 서늘한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요 며칠 전 비가 오고 난 다음에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든다.

아침저녁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갑자기 높아져 버린 하늘이, 무더위를 견디고 맞이한 가을이다.

혹자는 너무 날씨가 좋아, 독서하기에는 아깝다고들 하지만 원래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저녁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벗삼아 지낸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문화생활이기는 하지만, 본인은 천박한 3류 문화(?)로 대별되는 영화에 빠져 사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

특히 개업의로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빡빡하여, 책을 맞대어 보내는 시간은 불편할 뿐더러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쉽지 않다.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서 비디오를 능가하는 DVD란 매체 때문에 집에서 극장의 기분을 내며 여유롭게 영화 한편을 감상할 수 있다.

비디오와는 달리 DVD는 아직 대여할 마땅한 곳이 없어 대부분 구입을 한다.

DVD란 매체는 참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유명한 영화의 경우 일반 판으로 일단 출시가 된다. 그리고 그 후에 (6개월이 될 수도, 3년이 될 수도 있다) SE(special edition), CE(collector"s edition), UE(ultimate edition) 등으로 화질, 음질 등을 개선하고, 서플먼트라는 일종의 부록영상을 보강하여 재발매 된다.

예를 들면, Black Hawk Down이란 영화는 여름에 일반 판으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니아들은 구입을 망설이고 있다. 2003년에 음질과 화질을 보강하고, 서플먼트가 새로이 추가된 SE가 출시된다는 소문 때문이다.

이것이 판매를 늘리기 위한 마케팅 수단인지, 아니면 단순히 소비자를 위해서 시행하는 일종의 서비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매체의 특성상 좋은 화질과 좋은 음질의 유혹 앞에는 약해져, 나도 모르게 이미 소장하고 있는 타이틀을 SE, CE란 이유만으로 구입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스럽게 치장한 타이틀을 구입 후 항상 후회하게 된다. 훨씬 향상된 영상, 음향 그리고 영화의 뒷배경을 설명하는 화려한 써플먼트가 영화 본 편이 주는 감동의 강도를 올리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또 남들이 입이 마르게 음질과 화질이 좋다고 칭찬하는 타이틀도 구입해선 실망한 적이 한번 두 번이 아니다.

아무래도 영화 본편의 질이 타이틀의 구입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잘 다듬어진 스토리와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가 디지털 마스터링된 화질과 음질보다 더 중요한 영화의 요소라는 평범한 진리를,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 나간 뒤 뒤늦은 후회와 함께 다시금 발견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의료계에도 이런 평범한 진리가 적용될 것 같다.

요란한 문구로 포장된 광고나 홍보보다,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결과로서 환자를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DVD에서 영화의 본 편에 해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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