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Essay]

의대 시절 봉사활동부터 첫 발
공공의료 수행하며 국립병원서 수련
이젠 국내선 거의 사라진 언청이·산재 단지 환자
해외 의료봉사 통해 무료 수술 활동 이어와
이렇게 해온 지난 일들이 과연 공공의료일까?

필자는 1975년 지방소재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적십자청년의료봉사회(RCY)와 함께 무의촌 의료봉사를 활발히 하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면 소재지에서는 의사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고 최소한 30분 이상을 차편으로 이동해야 읍내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의료의 절심함이 필요했던 시기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군 현역복무 대신 공중보건의사로 무의촌에 배치를 받아 3년 동안을 같은 面에서 보건지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의대생으로서 봉사했던 의료봉사의 연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늘 찾아 다녔던 의료봉사가 한 지역에서 3년간 시행된다는 것만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소여물을 썰면서 작두에 손가락 끝이 절단돼 오는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 환자들, 쌀 수매 후 좌절해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던 많은 농부들, 처음 보았던 언청이 아기들로 청년의사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참외 하나 감자 몇 개 가져오시고 진료비는 외상이라고 하시며 겸언적게 웃으시던 할머님. 할아버님들 생각이 난다.

무의면에서 3년간 보건지소장으로서의 근무는 현재 공공의료라는 개념하에 가장 기본적인 의료단위로써 필자에게는 아주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이어진 전공의 수련을 받기위한 병원으로 국립병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병원은 보건복지부에서 사회복지기금을 지원 받아 그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던 저소득층의 언청이 아기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재건성형수술을 해주고 있었다. 1978년 복지부 소속으로 시작하여 1998년도에 각 지방자치단체 소관으로 이전 될 때까지 20년간 약 300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재건성형수술을 무료로 해준 공공의료의 표본 병원이었다.

1985년도에 이 병원에 들어 왔으니 필자도 13년 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부모들에게 밝은 웃음을 찾아준 역할에 일조를 하였고 2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들과의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무의면에서도 작두에 손가락 끝이 절단된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보고 당황해 했었는데, 이병원은 거의 매일 전국에서 손가락이 절단돼 오는 환자들로 야간 응급수술이 3건 정도 시행되었던 병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과거 무의면에서의 삶이 그대로 이어져 선천성 기형인 언청이, 응급외상인 손가락 절단 등을 재건성형하는 현재와 미래의 삶으로 연결되어져가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내에서 언청이 아기의 출생이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산업시설의 안전장비 현대화로 손가락 절단도 현저히 줄어 들었다.
그래서 눈을 해외로 돌려 2004년부터는 중국 심양시 소재 심양시구강병원, 2009년부터는 중국 연길시 소재 연변대학복지병원 등에서 언청이 환아들을 찾아가 무료수술을 해주는 해외의료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2013년 6월에는 처음으로 몽골 아르항가이 프로빈스 도(道)의 체체레그시를 방문해 선천성 기형(언청이, 다지증, 합지증, 소이증)과 백내장 등의 안과질환 무료수술에 대해 지방도립병원과 도(道)보건복지국과 협의를 하고 9월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1982년 2월 군의무관 후보생으로 입대해 3개월 훈련을 마치고 우연하지 않게 농어촌특례법에 따라 공중보건의사로 무의면에 배치 받아 근무하게 된 것이 2013년 7월 현재까지 31년간이나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이제까지 해온 일들이 과연 공공의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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