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내부적으로는 다들 한국 의료IT가 우수하고 강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현지에서는 HL7, IHE 등 국제표준을 가장 먼저 따진다. 그러나 한국 업체들은 국제 표준이 있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병원 해외 진출과 함께 EMR, PACS, OCS 등 의료IT산업 수출이 들썩이고 있지만, 정작 해외 진출은 멀어 보인다. 국제표준을 구축하지 않고, 개별 병원 적용에 급급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민간 연합기업인 KMH(Korea Medical Holdings) 이경수 부사장은 "사우디 정부간 협약을 추진하면서 현지에 나가보니 한국 기업들이 우수하다는 착각이 처참히 깨진 채 돌아왔다"며 "사우디에는 GE헬스케어 소속 직원만 100명이상이며, 현지에 진출해있는 의료IT 기업들도 상당하다. 우리는 이제 시작일 뿐이며, 브랜드 인지도도 낮다"고 토로했다.

특히, 국제표준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는 해외 현실과는 달리, 한국은 아무리 차세대 EMR을 구축한다고 하더라도 국제표준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국 의료IT 제품이 정말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해외 제품으로 모듈화시켜도 적용가능하도록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10년 전부터 논의됐지만 여전히 제자리

사실 의료IT에서 국제표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벌써 10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지난 2002년 대한의사협회는 의료정보표준화소위원회를 결성하고 의료IT업체들과 의료정보표준화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후 회장단이 바뀌면서 관련 사업은 연속성을 갖지 못하고, 위원회는 여러가지 단체에 흩어졌다.

당시 민간단체도 들썩였다. 2004년 대한PACS학회와 대한의료정보학회, 삼성SDS·LG CNS·리스템·중외메디컬·인피니트테크놀로지·마로테크·메디칼스탠다드 등은 PACS에서 IHE 표준을 따르기 위한 IHE코리아를 결성했다. 2005년에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EMR표준화를 위한 HL7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출범한 HL7코리아가 경북대 등 학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 전개를 이어갔다.

당시 업계는 "EMR, PACS, OCS 등의 도입 확산에 따라 국제표준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며 "아시아지역 공동 사업을 추진하면서 최신기술 동향을 반영해 업체마다 다른 제품간 호환성을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지금도 일부 모임의 명맥은 이어가고 있지만, 업계 전체가 참여한 큰 틀에서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는다.

2005년에는 보건복지부의 통합의료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한 EHR사업단이 출범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대형 병원들이 개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EMR 네트워크를 구축, 병원 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야심찬 프로젝트다. 정부 예산 90억원과 민간업체 투자액 50억원 등 총 140억원의 투입됐으며, 연구진만 총 250명에 달했다. 연동을 위한 CCR 표준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오갔다.

그러나 2009년 예비타당성 검토 결과,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아 사업이 전격 중단됐다. 이후 사업단이 해체되고 연구결과도 적용되지 못했다. 마땅한 결과물없이 공중분해되면서 비판이 쏟아졌고 관련 업계는 아쉬워했다. 가톨릭중앙의료원, 한림대의료원, 서울시립병원 등 산하병원이 여럿인 병원들의 EHR 시도가 잇따랐으나 뚜렷한 결과물을 제시한 곳은 없다.

현재 EMR에서의 국제표준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나마 인피니트헬스케어 등이 미국 등지에 많이 진출한 PACS는 좀 낫지만, PACS 역시 국내에서는 표준화돼있지 않다.

개별 병원으로는 분당서울대병원이 HIMSS(미국보건의료정보관리 시스템협회) Analytics 6단계를 인증받았다. 그러나 국제 표준을 이용한 병·의원 간 전자적 진료 정보 교류를 중점적으로 심사하는 레벨7 단계는 여전히 과제로 남겨져 있다.

한국디지털병원수출협회 이민화 이사장은 "관련업계가 단기적 이익을 위해 폐쇄하지 않고 개방함으로써 한국은 물론 세계시장의 표준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면서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국내 의료관련 여러 개발전략이 디지털병원 수출의 관점에서 함께 융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체·병원 모두의 책임...정부 의지없인 불가능

국제표준이 갖춰지지 않는 이유는 개별 병원들의 요구에만 맞춘 의료IT업체, 병원 간 정보 교류에 관심없는 병원,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부 등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의료 IT업체 관계자는 "EMR 등의 국제표준의 중요성이 벌써 10년 전부터 나왔지만, 병원에서는 국제표준보다 병원에서 제대로 동작하는 것을 요구한다. 혹여 병원의 일부 업무프로세스를 국제표준에 맞추고 적용시킨다고 하면, 완료검수를 해주지 않거나 업체를 교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다"라고 호소했다.

미국의 의료IT업체 관계자는 "국제적인 표준을 갖추고 한국 시장에 진입하려 했으나, 개별 병원마다 다른 시스템이 적용된 한국 특성 상 진입이 어렵다"며 "계약을 따더라도 업체를 상대로 개별병원 모듈화에 익숙한 병원들이 비용을 책정하지 않은 채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토로했다.

업체는 ‘갑’인 병원들의 요구에 맞출 수 밖에 없으며, 병원이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가 표준이 더딘 가장 큰 이유로 보고 있다.

병원들은 우선 다른 병원과 환자 정보가 공유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보안, 책임 문제 등을 우려했다. 더욱 깊숙한 곳의 속마음(?)은 병원 간 정보를 교류하면 시스템 구축을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소요되지만, 별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오히려 개별환자의 검진 등의 별도 수익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정부 차원의 의지도 부족하다. 미국은 보험재정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IT기술을 활용한 병원 간 진료정보 교류를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관련 사업을 중단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직 새정부 출범 초기긴 하지만, 관련 인원이나 예산이 할당돼 있지 않다.

향후 미국에 국제표준 주도권을 내주면서 시장 진입이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즉, 한국의 의료IT 강국은 실체없는 물거품과 같다는 이야기다. 관련 전문가들은 국제표준이 필요하단 생각은 하지만 어느 곳 하나 움직이지 않는 만큼, 해외 진출 사업 등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EHR사업단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업체들은 병원의 요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병원은 수익에 악영향을 미치는 시스템 구축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보건의료에서의 무리한 규제가 아닌 산업 전반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중요하다"며 "앞으로는 EMR 구축만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표준에 대한 구축이 필요하다. 국제표준을 갖춰야만 해외 진출과 불필요한 비용 절감 모두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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