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갖춘 침묵의 살인자 고혈압

완전범죄는 없다 - 맞춤 진단·진료로 ‘절반의 법칙’ 깬다

고혈압은 일명 ‘침묵의 살인자’로 불린다. ‘소리 없는 저승사자’라는 더 무서운 별칭도 있다.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다. 때문에 고혈압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안다 해도 증상이 없으니 당장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치료에 소홀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방치했다가는 고혈압의 치명타에 삶의 질, 최악의 경우에는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다. 합병증인 심혈관질환으로 인해 장애나 사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완전범죄를 달성한 고혈압은 자신에게 무지하고 무감각했던 이들을 비웃으며 다음 희생자를 찾아 나선다. 침묵의 살인자, 고혈압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이러한 완전범죄를 가능케 하는 요인들을 몇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증거 은닉
고혈압은 소리 없이 다가와 무장해제된 상대의 몸을 야금야금 좀먹다가 마지막 치명타를 가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치명타란 합병증을 의미하는데, 심혈관질환 이환 및 사망이다. 고혈압은 증거를 감춰가며 추적을 따돌리다가, 결국은 완전범죄를 꾀하는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에 준한다.

천의 얼굴
완전범죄를 돕는 요인들은 이 외에도 몇 가지 더 추가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혈압은 네가지를 갖춘 다재다능한 범죄자다. 고혈압은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진단을 어렵게 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힘들게 한다. 고혈압이 갖추고 있는 천의 얼굴은 혈압 변동성과 유형의 다변화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혈압 변동성이란 간단히 말해 혈압이 수시로 변한다는 개념이다. 혈압은 일반적으로 개인이 처해 있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한다.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의 혈압이 다르다. 잠잘 때, TV를 볼 때, 책을 읽을 때, 이야기 할 때, 걸을 때, 일할 때는 물론 회의 중에도 적게는 1 mmHg 미만에서 많게는 20 mmHg 이상까지 높아진다.①

문제는 이러한 변동의 폭이 고혈압 경계치를 넘나든다는 것. 이렇다 보니 혈압을 언제, 어디서 측정하느냐에 따라 정상혈압이 고혈압으로 고혈압이 정상혈압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를 침묵의 살인자에게 적용하면,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능력으로 인해 범인을 눈 앞에서 놓치거나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고혈압은 위장술에도 능하다. 정상인데 고혈압이라고 믿게 만드는 백의 고혈압이나②, 고혈압인데 아니라며 얼굴을 가리는 가면 고혈압③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때는 멀쩡하다가 유독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아침 고혈압④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도 하나의 몽타주(montage)에만 의존하는 경우에는 범인이 자유자재로 활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아침 고혈압의 경우, 범인이 활동하는 시간을 알아야 검거가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유명 포털 사이트들을 통해 전해지는 고혈압에 관한 지식을 보면, 진단이 쉬운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침묵의 살인자의 능력 중 하나인 천의 얼굴을 고려하면, 고혈압의 진단은 결코 쉽지 않다. 쉽게 다뤄서도 안될 일이다.

공범
고혈압에게는 범죄의 실현, 즉 심혈관질환 이환이나 사망의 완전한 실행을 돕는 공범들이 있다. 고혈당·이상지질혈증·비만 등의 여타 심혈관질환 위험인자들인데, 이들이 함께 모이면 범죄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고혈압을 비롯한 심혈관 위험인자들이 다중 발현되는 경우, 심혈관사건 위험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4가 되는 형국이다.

특히, 이들 심혈관 위험인자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고혈압·고혈당·이상지질혈증·비만 등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들이 동시에 발현되며 친목(親睦)을 도모하는 경우, 인자들 간 상호작용(cross talk)으로 동맥경화증과 같은 심혈관장애가 발생하거나 악화돼 혈압조절 뿐 아니라 합병증 예방이 더욱 어려워진다.⑤

고혈압 환자에서 혈압상승만이 단독으로 관찰되는 사례는 드물다. 대부분에서 지질이상·당뇨병·비만 등 추가적인 심혈관 위험인자가 동반된다. 이러한 위험인자들이 함께 모여 범행을 꾀하는 경우를 학계에서는 대사증후군이라 지칭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고혈압만 잡고 공범들을 방치해서는 심혈관질환 이환 및 사망을 궁극적으로 막기가 어렵다. 다중 위험인자의 발현과 상호간의 작용으로 인한 심혈관질환 위험을 고려한다면, 심혈관사건의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고혈압 치료 역시 결코 쉽지 않다.

치명타
고혈압은 완전범죄의 완성을 위한 결정타를 가지고 있다. 이 결정타가 대부분 치명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내피세포기능장애 → 혈관의 구조·기능적 손상 → 표적장기손상의 과정을 거쳐 동맥경화증의 발생과 악화에 영향을 미치는 기전이다. 동맥경화증은 심혈관질환의 기저병태로, 악화가 진행되면 결국 심혈관사건(심혈관 원인의 사망, 심근경색증, 뇌졸중 등)으로 이어진다. 고혈압이 노리는 최종 목표가 바로 이 심혈관사건이다.

고혈압은 특히 뇌졸중의 가장 중요한 위험인자로 알려져 있다.⑥ 고혈압 환자들은 정상인과 비교해 뇌졸중 위험이 7배, 관상동맥질환 위험은 3배 가량 높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혈압 합병증으로 뇌졸중이 여전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운데, 고혈압 자체로 인한 출혈성 뇌졸중(뇌출혈)은 감소 추세에 있으나 고혈압에 의한 동맥경화 촉진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허혈성 뇌졸중(뇌경색)은 증가하고 있다.

대한고혈압학회 진료지침에서도 뇌졸중 발생의 인구기여위험도에서 고혈압(35%)이 가장 중요한 인자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사망원인 통계에서 단일 질환으로는 뇌혈관질환이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혈압의 관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맞춤진단
반면 고혈압을 추적하는 현대의학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 완전범죄에 능한 고혈압이지만, 앞서 살펴 보았듯 범행 현장에 꼬리를 남기며 일정한 패턴을 노출하고 있다. 현대의학은 이를 놓치지 않고 기초·임상연구를 통해 고혈압의 발생기전·병인론·유병특성 등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

천의 얼굴을 한 고혈압을 놓치기 쉬웠던 것은 진료실 혈압, 즉 하나의 몽타주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혈압 진단 툴로서 진료실 혈압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가정혈압이나 활동혈압을 통해 범인의 24시간 밀착 감시가 가능해졌다. 백의·가면·아침 고혈압 등의 정밀 진단이 가능해 지면서, 적어도 범인을 눈앞에서 놓치거나 엉뚱한 사람을 잡는 일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 만큼 고혈압이 운신할 수 있는 폭도 좁아진 것이다.

더 나아가 중심대동맥압과 동맥경화도검사의 등장으로 고혈압의 진행 정도와 예후까지 정확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됐다. 바야흐로 고혈압 맞춤진단의 시대가 도래했다. 다만 이러한 기술적 진보를 임상현장에 어떻게 비용효과적으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필요하다.⑦

맞춤치료
맞춤진단은 맞춤치료를 가능케 한다. 백의·가면·아침 고혈압의 진단이 가능해진 만큼, 치료결정과 전략 역시 환자에 따라 세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⑧ 혈압 변동성이 고혈압 예후의 주요 인자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이를 타깃으로 하는 치료전략도 논의가 진행 중이다.

연령·성별·동반질환·인종에 따른 고혈압의 유병특성도 파악되고 있다. 환자의 임상특성에 따른 맞춤치료 전략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⑨ 고혈압과 공범들이 모여 범행을 도모하는 경우에도 인자 간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한 결과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약제들의 기전이 드러나면서, 계열 약물의 고유한 특성을 기반으로 한 맞춤약물(단독·병용요법) 선택이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고혈압만이 아닌 여타 심혈관 위험인자들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는 심혈관 위험인자 종합관리 패러다임도 이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고혈압의 치명타가 우려되는 심혈관사건 고위험군의 경우에는 초기부터 서로 다른 기전의 약물을 병용해 혈압강하는 물론 심혈관사건 예방에까지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보고들이 이어지고 있다.⑩

이상의 고혈압 진단과 치료의 진보는 ‘고혈압 환자의 절반 가량이 자신이 고혈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안다 해도 절반은 치료받지 않으며, 치료를 받아도 절반은 정상혈압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절반의 법칙을 깰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네가지를 갖춘 다재다능한 침묵의 살인자 고혈압, 이제 완전범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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