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근대 최초 일본·미국 유학생 유길준


보빙사 일행 체류기간 내내
미국 언론 호기심 대상
미국 최초 기숙사립학교
덤머아카데미 입학


미국에 간 유길준 일행은 현지인들에게 서울대공원의 원숭이보다 더 신기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일행은 미국 체류 기간 동안 내내 미국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1883년 9월 7일자 뉴욕 타임즈는 이렇게 유길준 일행을 보도하고 있다.

"일행은 길이가 2인치 또는 3인치가 되는 상투에다가 호박 달린 망건, 그 위에 탕건과 갓을 쓰고 있었다. 갓은 대나무테에다 명주실과 말총으로 짠 것인데 투명체이다. 그 생김새는 퀘이커 교도가 쓰는 모자와 실크해트 절충한 것처럼 보였다. 탕건은 마치 젤리 깡통처럼 생겼다."

9월 12일 시카고 버링톤 퀸시로드 역에 도착했다. 역에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육군중장 필립 쉐리던 장군 일행이 나와서 보빙사 일행을 영접했다. 여기서도 유길준 일행의 옷차림은 구경거리였다. 시카고 트리뷴지는 1883년 9월 13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유길준 일행을 묘사했다.

"조선 보빙사 일행의 옷차림은 참으로 이상했다. 주아브 병사(아라비아 옷을 입은 알제리 인으로 편성된 프랑스 경보병)들처럼 통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헐렁하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무릎까지 내려왔다. 천은 비단인데 취향에 따라 색깔은 다양했다.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도 그들은 모자를 벗지 않았다. 보빙사 일행은 모두 기혼인데도 부인을 동반하지 않아 이상해 보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은 여성을 천시한다. 조선은 조혼 풍습이 있다. 모든 남자는 본부인 외에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으며 한두 명의 첩을 거느릴 수 있다. 조선인은 내외 풍습이 있다. 조선인들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녀가 절대 키스하는 법이 없다."

조선의 초대 주미 전권공사 민영익의 신임장 제정은 15분 만에 끝났다. 일행은 1883년 11월 10일 뉴욕을 떠나 귀로에 올랐다. 민영익은 수행원으로 따라온 유길준에게 미국에 남아서 새로운 문물을 더 익히고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유길준이 유학생으로 남아서 개화작업을 계속 추진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유길준은 미국의 어느 지역에 남아서 공부를 할 것인가 고민했다.

일본에서부터 보빙사의 참사관으로 따라온 퍼시빌 로웰은 유길준에게 에드워드 모스 교수를 소개해줬다.

참 묘한 인연이다. 모스 교수는 유길준이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집에 머물 때 종종 만나던 인물로 도쿄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보스턴 출신의 로웰은 동아시아 문화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던 에드워드 모스 피바디 박물관장을 유길준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생물학자였던 그는 진화론을 입증하기위해 자료수집 차 일본에 갔다가 전공인 생물학과는 관계가 없는 동북아시 문화에 흠뻑 심취하게 됐다.

도쿄 대학이 1877년 개교했을 때 생물학과 초빙교수로 일본을 찾았던 그는 한국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83년 11월 10일을 전후해 로웰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를 찾은 유길준은 2년여 만에 모스 교수와 재회를 했다.
모스 교수는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유길준의 말을 듣자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했다. 모스 교수는 유길준에게 영어와 미국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을 가르쳤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유길준이 얼마나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였는지 신문기사로 소개하고 있다.

"사절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인 유길준은 자기나라 복장을 벗고 서양옷을 입고 다닌다. 그는 메사추세츠주 세일럼시 에드워드 모스 교수 지도하에 학생이 되어 이 나라에 머물 예정이다. 어제 저녁 이 젊은이는 뉴욕 5번가에 산책을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경찰관에게 영어로 숙소로 가는 길을 물어 찾아갔다."

모스 교수는 1884년 작성된 피바디 박물관 연례 보고서에서 민영익과 유길준 등 보빙사 일행이 피바디 박물관에 많은 한국 물건들을 기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피바디 박물관에는 당시 유길준이 입었던 한복 두루마기와 신발, 모자,버선, 부채, 내복까지 남아 있다.

"세일럼은 외국의 한 젊은이에게 미국의 관습과 예절을 가르치는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모스 교수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온 26세 청년 유길준을 로렐가에 있는 그의 집에 유숙시키고 있다. 유길준은 일본에 1년간 거주하면서 일본어를 배운 바 있다. 그는 모스 교수와 일본어로 대화한다. 유길준은 지난주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으나 집에서는 입지 않는다. 그는 외양과 태도에서 대단히 신사답다. 기자는 동인도해운협회 회관(현재 피바디 박물관 본관)에서 유길준을 소개받았다. 모스는 유길준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충분히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 1883년 11월10일자 세일럼 이브닝 지 기사.

지난 1994년 세일럼시를 방문해 '유길준과 모스교수(유길준과 개화의 꿈)'를 기사로 실었던 당시 조선일보 김태익 기자는 피바디 박물관에 보관 중인 1884년∼1885년 세일럼 거주 시민들의 주소록에서 유길준의 흔적을 발견했다. 김 기자는 유길준의 영문 이름이 'Yu Chil Chun’으로 신분은 ‘student'로 주소는 '12 linden’으로 돼 있었다고 전했다.

유길준은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세일럼시 린든 스트리트 12번지 모스 박사의 집에서 6개월간 머물며 영어를 배웠다. 그 때 유길준이 모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가 지금 피바디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길준은 이 편지 말고도 1884년 6월 7일부터 그가 한국으로 귀국해 활동하던 1897년까지 13년 동안 모스 교수에게 19통의 편지를 보냈고 이 모두가 잘 보관돼 있다.

"오늘은 제가 세일럼시에 나와서 오랫동안 교수님과 교수님 가족들에게 도움을 받다가 교수님 댁에서 나온 후 맞는 첫 일요일입니다. 저는 매우 건강합니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친절하게 잘 보살펴주시는 집주인 아주머니와 가족 때문에 즐겁습니다. 언제 저희집에 오시겠습니까? 만일 오실 계획이 있으시면 제가 다음주에 일요일에 교수님댁을 방문하여 하루를 지내겠습니다." - 1884년 유길준이 모스 교수에게 보낸 편지.

모스 교수는 유길준을 덤머 아카데미 교장인 퍼킨즈씨에게 소개해 1894년 9월부터 공부하도록 했다. 1763년 뉴잉글랜드 부지사 윌리엄 덤머가 세운 이 학교는 미국 최초의 기숙사립학교로 당시 동부의 수재들이 다녔다. 이 학교 졸업생들의 상당수가 하버드대학에 진학을 했다. 나중에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유길준이 만일 이 학교를 졸업했더라면 한국인 최초의 하버드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유길준이 다니던 당시 덤머 아카데미의 재학생 수는 40명이었고 학생 모든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지금도 미국 기숙학교가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이듯이 당시 덤머 아카데미도 4년 과정이었다. 주로 그리스, 라틴어, 영문법과 수학, 과학 등을 가르쳤다.

미래교육연구소 이강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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