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통한 의학교육

컴퓨터와 인터넷은 세상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의학과 동반자적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양자의 친밀한 관계는 의학의 학문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의학은 근본적으로 범지구적(global)인 학문이며, 따라서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인터넷과 의학의 만남은 필연이다.

연구·진료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발전하는 의학의 특성상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않고 자유로운 토론과 자료공유 등 원격지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은 이미 오래 전에 의학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가 되었다. 또한 도해와 음향, 영상을 중시하는 의학의 다매체성도 80년대 이후 뛰어난 멀티미디어를 특성으로 발전시켜 온 컴퓨터와의 궁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성이며, 의학의 데이터베이스 의존성, 메타-자료(meta-data)성, 증례(case) 의존성 또한 컴퓨터 및 인터넷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시사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이런 특성들로 인해서, 그동안 의학은 컴퓨터, 인터넷과 상호 발전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의학교육에서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적지 않은 효용성을 과시해 왔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의학교육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이 가장 널리 활용된 분야는 학습자원센터, 사진 및 영상 데이터베이스, 시뮬레이션(simulation), 컴퓨터 시험(examination), 프로그램학습(programmed learning), 온라인 연수교육 튜토리얼(tutorial) 분야이다.

다른 분야에 비하여 훨씬 다량의 학습자원을 포함하고, 비주얼이 강조되는 의학교육의특성을 고려할 때 인터넷 학습자원센터와 사진·영상 데이터베이스의 발전은 납득할 만하다.

또한 hard skill(手技)과 soft skill(problem solving skill 등)이 강조되는 의학교육에서 풍부한 스킬 학습을 위한 안전한 시뮬레이션(safe simulation)이 가능한 컴퓨터가 활용되는 것, 인쇄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고화질의 자료나 동영상을 포함하는 시험이나 PMP(patient management problem)와 같이 복잡한 로직(logic)에 기반을 둔 시험을 편리하게 구현할 수 있는 컴퓨터가 활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의학교육 분야에서 컴퓨터 활용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 인프라의 부족을 생각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컴퓨터 및 인터넷의 하드웨어 보급률은 국제적 수준이다.

그러나 하드웨어나 네트워크 인프라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 인프라이다.

당장 가시적으로 성과가 드러나는 하드웨어에만 투자하고 소프트웨어에 투자를 적절히 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관행이 여기서도 문제가 된다.

문화적 수용성도 장애가 되고 있다. 교수들은 면대면 집합 교육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있고, 자율학습이나 문제중심학습은 아직까지 일부 의과대학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교수들이 인터넷 자료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 대학은 거의 없다.

한편, 활용방안에 관한 실천적, 실험적 연구의 부족도 중요한 장애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의학교육에서 컴퓨터의 활용방안이라는 것이 대개는 외국의 사례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테크놀러지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토착적 요구(needs)와 손을 잡아야 한다.

테크놀러지는 수단이고 환경일 뿐이며, 그것을 어떻게 살리는 가는 영역지식(domain knowledge)의 성격 및 문화, 지역적 요구와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는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교육에 인터넷을 통합하는 방안 중 외국 학생들과의 온라인 토론이 단연 돋보이고 의학교육에 인터넷을 통합하는 방안 중 안전한 시뮬레이션이 돋보이듯이, 컴퓨터와 인터넷의 무한한 가능성 중 어떤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개발할 것인가는 토착적 요구에 근거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즉 호주같은 국토가 넓고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에서 컴퓨터 교육의 효용성은 주로 지역적 분산이라는 장애를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둔다.

교수 수가 부족한 곳에서는 컴퓨터가 교수의 부족을 보완하고 다양한 증례가 부족한 곳에서는 증례를 보충하며 학생들 사이에 대화 및 협력의 기회가 부족한 곳에서는 대화 및 협력 기회를 증진하는 데 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의학교육에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에 관하여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그 예시로서 중점적으로 활용방안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분야들을 나열해둔다.

물론 여기에 제시하는 분야 외에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할 분야는 의학교육에서 무궁무진할 것이다.

가장 거시적인 활용분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육과정 관리영역이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은 각 교육과정에 대략 1만 수천 여개가 넘는 학습목표를 포괄하고 있으며, 이의 표준을 제시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관련 단체가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인터넷을 활용하면 각 대학의 학습목표, 학습목표 수준의 교육방법을 대학간에 실시간으로 서로 비교 검토하고 갱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서울의대 의학교육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같은 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작업을 추진하여 왔다.

미국의과대학협회의 CurrMIT와 유사한 시스템인데, 미국의 예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학장협의회 등에서 이런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시스템은 PBL, 통합교육 등 다양한 교육방법을 도입하려고 할 때 더욱 효용성을 발휘한다.

기존의 강의위주 교육과는 달리 이같은 새 교육방법을 골간으로 하는 교육과정은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교육콘텐츠를 모니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들이 국가시험 합격률 때문에 다양한, 학생주도의 학습방식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이 같은 시스템은 의과대학 교육과정의 변혁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더불어 학습목표 수준의 키워드를 메타데이터로 가지고 있는 학습자원센터의 운영도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위 교육과정 관리 시스템과 학습자원센터를 연동하여 학습목표를 관리, 갱신하면서 학습목표별로 최적의 학습자원과 부족한 학습자원을 모니터하고 관리할 수 있으며, 이 시스템은 국가시험의 출제영역을 각 대학의 교육내용에 근거해 판단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CPX(Clinical Performance Examination) 등 실제 수행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컴퓨터 기반 국가시험 방식의 개발이다.

지식 암기 위주의 교육을 탈피하기 위해 국가시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필요성이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편 우리나라의 많은 의과대학 학생들이 다양한 기본적 증례들을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도 인터넷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선 동문들이 웹을 통해 증례를 제공하는 증례중심학습(case based learning)을 위한 1, 2차 병원-의과대학 네트워크 구축방안을 강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웹의 활용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행동주의(behaviorism) 교수학습이론에 입각한 전통적인 교수중심 방식을 웹에 그대로 올려놓는 것은 웹이 가지고 있는 폭넓은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으며, 구성주의(constructivism) 교수학습이론에 입각하여 문제 중심, 혹은 프로젝트 중심의 웹기반 협력학습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있는 사례들이 많다.

우리 의과대학생들이 주체적 학습, 협력, 대화, 발전적 논쟁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방식의 개발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웹기반 협력학습은 의료윤리 딜레마 상황, 임상적 의사결정과 같은 다양한 견해가 가능한(multiple perspective), 복잡한 지식(complex knowledge) 영역 학습의 현장 전이(transfer of knowledge)에 매우 유효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산-염기 균형과 같이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기초과학 개념의 올바른 정립에 있어서 협력적인 지식구축환경(knowledge building environment)의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말에 꽃망울을 터뜨린 컴퓨터와 인터넷은 21세기에 들어 의학교육 분야에서 다시 한번 활짝 꽃을 피우리라 믿고 기대한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