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도 동료도 아이들을 유학보냈는데….’ 내 아이의 장래가 달린 일인데 너도나도 유학을

1. 교육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나라 최초 조기유학생 최치원
12살 때 중국 당나라로 가 공부
‘제2의 최치원’ 매년 수십만명 유학길

일본어의 '코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비단잉어다.

이 코이라는 비단잉어를 작은 수족관에서 키우면 8 cm내외로 큰다고 한다.

거친 환경이 아닌 보호받는 상황에서는 몸집을 키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기를 연못으로 옮기면 20∼40 cm로 자란다. 다소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집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오리가 잡아먹을 수도 있고 다른 물고기의 밥이 될 수도 있다.

이를 다시 큰 강에 풀어 놓으면 최대 1 m 20 cm까지 큰다. 넓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커야 한다. 1 m 20 cm로 크면 별로 두려워할 대상이 없다.

낚시에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 비단잉어 코이는 환경에 따라 그 자라는 크기가 달라진다. 8 cm로 클 것인가 아니면 120 cm로 클 것인가? 그것은 잉어의 선택이다.

서기 869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지금의 경주)에서 12살 소년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그의 아버지(최겸일)의 손에 이끌려 지금의 전라남도 영산포까지 10여일을 걸어간다.

아버지 최겸일은 아들 최치원에게 왜 그 먼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려운 유학 생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또한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정세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다. 총명한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은 그의 저서 '계원필경'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제가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쪽으로 가려고 배를 탈 때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를 아비라 부르지 마라. 나 또한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것이다. 가거든 부지런히 힘써 나태하지 말고 노력해라'고 하셨습니다."

고운 선생은 "저는 아버지의 엄훈을 마음에 깊이 새겨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쉴새 없이 노력했으며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힘썼습니다. 남이 100번해서 이루면 저는 1000번을 해서 유학 온 지 6년 만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인 '빈공진사과'에 장원을 한다.

최치원 선생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기 유학생'이다. 12살에 당시 세계 최대국가이자 선진국인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교육열'이 오늘 한국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해외유학이 큰 물결을 이뤘던 시기가 통일 신라시대였다.

당시 신라의 귀족들과 6두품들의 자제들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을 '출세'의 지름길로 여겼다.

실제로 당나라에 유학을 해서 빈공진사과라는 과거에 합격한 신라 유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으로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고려 초기에 잠시 송나라 이후 원나라로의 유학이 성행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관리들이 잠깐 명나라에서 공부했지만 유학의 큰 물결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후 조선말 즉 1880년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유학생들이 해외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이들이 근·현대 한국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기술하기로 한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 교육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다. 한국이 40여년 만에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진입을 한 것도 기실 교육의 힘이다.

'잘 살아보자!'고 온 국민이 힘을 합치던 시절, 논 팔고 소 팔아 우리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것이 오늘의 한국을 있게 만든 힘이다. 부모가 교육비 부담 때문에 소를 팔고 논밭을 파는 것에 비교해 대학을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 대신 '우골탑'(牛骨塔): 소의 뼈로 쌓은 탑)이라고 폄하했지만 그 우골탑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됐다.

1960∼1970년대에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는 시대였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해외유학'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과거 유학이라고 하면 '부자 아빠'들의 전유물처럼 생각됐고 '유학생'들을 '오렌지족'이라고 비하하며 한국학교에서 부잣집 문제아나 선택하는 '공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보통 아빠', '가난한 아빠'들의 자녀들도 선택하는 교육방법이 되었다.

2011년도 4월 현재 우리나라에서 떠난 유학생은 28만 9288명이다. 지난 2006년 19만여 명에서 2007년도 21만 7000여 명, 2010년에 25만여 명 등 계속 증가 추세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해외로 공부하러 가는 학생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이 7만 2000 명으로 가장 많고 중국이 6만 2000여 명, 영국이 1만 7000여 명, 호주가 3만 3000여 명, 그리고 일본이 2만 5000여 명 등이다. 미국, 중국, 일본, 호주 지역이 압도적이다. 이를 다시 이를 다시 과정별로 보면 대학원 4만 799명, 대학 12만 3370명, 중고등학교 및 어학연수 12만 5199명 등이다.

해마다 특히 미국으로 떠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유학생 숫자는 F1비자(유학생비자), J1비자(교환학생비자)를 합쳐 약 5000여 명에 이른다. 제2의 최치원들이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유학을 떠나는 것이다. 신라시대 때 유학생들이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당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면 이제는 미국으로 그 대상국이 바뀌었다.

자녀교육에 모든 희망을 거는 한국 학부모들에게 '유학'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벅찬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좁은 어항에서 8 cm가 아닌 넓은 강에서 1 m 20 cm로 자녀가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들은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학'이라는 자녀교육 방법을 택하고 있다.

미래교육연구소 이강렬 소장
전화: 1577-6683 / 메일: tepikr@gmail.com

■ 이강렬 소장은
한국 언론계의 중진 저널리스트로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평화방송, 국민일보 등에서 31년간 활동을 했다. 국민일보 편집국장, 대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했고 2000년에 미래교육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교육 전문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유엔총회 산하 유엔평화대학 아·태센터 재단 이사장 등 교육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가난한 아빠 미국명문대 학부모되기',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등 교육관련 저서 5권이 있고 매체에 기고를 하고 있다.

■ 미래교육연구소는
미래 지도자인 청소년들의 해외교육(유학)을 도와주는 해외교육 전문컨설팅 기관이다. 지난 2000년 설립이후 연 인원 3000여 명을 컨설팅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가난한 가정의 우수한 학생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미국 명문대학 장학금(Financial Aid) 컨설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2012년에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미국 80개 명문대학에서 31억 3000만 원의 장학금을 받도록 컨설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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