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뇨기과학 초석 세운 東橋 주근원 박사

"비뇨기과학교실은 1946년 서울의대가 개교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분리 독립했습니다.

나는 일반외과를 전공했지만 새롭게 출발하는 비뇨기과로 방향을 바꿨죠.

이후 주임교수·과장을 맡아 비뇨기과학교실 발전에 최선을 다했고 대한비뇨기과학회 창설에도 나서, 오늘날의 비뇨기과가 되는 초석을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東橋 朱槿源박사(85세). 그는 반세기 훨씬 이전인 1946년, 열악한 의료환경속에서도 선진 의료 체계의 접목을 위한 대모험을 시작했다.

당시 피부비뇨기과학교실이 외과에서 미국식으로 각각 분리 운영케되자 가장 인기있던외과 전공을 접고 이학송 교수·이기혁 강사와 함께 과감하게 독립, 창설되는 비뇨기과의 출발선에 선 것.

그리고 1983년 정년퇴임시까지 37년간 교육자로 헌신했고 퇴임후 19년이 지난 2002년 8월 오늘까지도 함춘원 남쪽 옛 경성제대 의학부 건물 208호에서 온고지신중이다.

비뇨기과학교실 첫 장

서울의대가 타의대보다 20년 앞서 비뇨기과학교실이 분리 신설될 수 있었던 것은 시설이 완비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립 수술장이 존재해 있었고 방광경실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선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광복후 어려운 의료현실은 타의학분야와 마찬가지로 교실의 출발을 수월케 하지만은 않았다.

"의학교과서를 구하기 어려웠고 의료소모품이나 기기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미8군의무감실 의사를 통해 구걸(?)을 하듯 확보해 나갔습니다.

특히 부족한 교과서는일일이 타이프로 쳐서 책을 만들어 나눠 가졌죠.

그러나 이나마도 6·25전쟁으로 대부분 잃어버리는 아픔이 뒤따랐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자원입대했고 1954년 제대후엔 학교와 교실 재건에 참여했다.

미네소타플랜에 의해 미국서 공부(1956~1957)를 마치고 귀국할때엔 교재가 없었던 아픔의 경험때문에 교과서가 수하물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게 됐단다.

귀국후 보사부가 전문의제도 도입실시 방침을 결정하자 서울대병원 수련부장이던 그는미네소타대학에서 전국적으로 파견된 Flink교수와 협의, 1958년 4월 국내 최초의 제1회 인턴을 선발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턴·레지던트의 효시며, 후에 전문의제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또 대학병원 의사요원의 확보가 시급해지자 1958년 개인친분이 있는 김정렬 국방부장관과 협의, 의대졸업생중 군요원을 책정,수련기관서 5년간 전문교육을 마치고 군에 입대토록 하는 소위 "Kim"s Plan"을 시행토록 하는데 일등공신이 됐다.

인적자원이 늘고 시설이 복구되면서 교수 배출도 정상궤도를 보이는 즈음 그는 1969년 인공腎을 도입, 운영하여 신부전증 치료에 획기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신장이식수술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 참여, 우리나라 이식수술의 발전에 전기를 맞도록 했다.

의학교육 발전을 위해 block lecture 강의방식을 도입한 것도 이때였다.


관련 학회 연이어 창립

이외에도 서울대병원신축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1968년 기공·1978년 개원하며 부원장을 맡아 오늘날의 병원이 되도록 토대를 마련한 것도 그의 열정과 희생적 봉사가 큰 힘이 됐으며, 동창회원 명부 정리도 그의 성과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학계에 끼친 그의 큰 영향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 주박사를아는 학자들의 일관적인 입장이다.

주박사는 그의 "70년 세월" 회고록에서 "연구업적은 대단치 않으나 진료와 교육에는 최선을 다했고 천하의 영재를 가르칠 수 있어 흐뭇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스스로 많은 관련학회의 창립을 주도, 연구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한국의학의 획기적 발전을 이루는 촉매제가 되었다.

대한비뇨기과학회의 창립 주역은 물론 불임학회, 신장학회, 이식학회, 화학요법학회, 감염학회 등의 창립에 핵심역할을 했고 1970년 의협 학술이사였을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되는 국제학회인 제7차 아세아태양주의학협회(CMAAO)의 학술준비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렀다.

"지금은 500명이 참석하는 국제학회가 규모는 작을 지 몰라도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의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리넨 박사나 이식의 대가인 스타즐 교수 등을 특강연자로 모시기 위해 미국과 유럽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이틀간 조선호텔에서 열린 학회는 우리나라 의학의 현실을 알고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됐습니다."

주근원 박사는 1983년 정년후 한국자동차보험회사 상임고문으로 취임하게 되자 교통사고 예방과 공정한 후유장애 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 오랜 준비를 거쳐 1989년 한국배상의학회를 창립했다.

초대회장으로서 그는 현재까지 법조계·보험업계·의료계의 협조로 불모지인 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그러나 배상의학에 관한 현직 의사들의 관심이 적은 것은 여전히 불만이다.

장애등급의 규정이 없어 외국의 예를 기준으로 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정규교육과정 포함과 교수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주박사의 생각.


의대난립 의료질 저하 우려

그는 최근 서울의대 졸업 36회 동기회 20주년 홈커밍데이에 참석, 160명의 졸업생중 93명이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매우 기뻤다며, 격려 인사를 통해 스스로졸업 20주년이 된 제자들에게 20년후 정년까지 최선을 다해 줄 것과 정년 후 20년 이상 의사로써 봉사할 것을 주문했다.

주박사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활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재의 의료제도에 대해선 불만이 많다.

의대난립에 따른 의사 과잉은 향후 의료 왜곡현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의료현실을 무시하는 정부의 강한 통제는 의료질의 추락을 우려하게 된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료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불합리한 의료제도의 시급한 개선과 사보험 도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떳떳히 살자"는 가훈으로 삼고 있다는 주박사는 "덕은 무한하고 힘은 유한하다"는 것이 85년 인생 결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함춘원의 8월 오후 햇살은 시계탑건물 꼭대기에 걸쳐 석양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진·김형석 기자 hskim@kimsonl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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