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우리 정부는 신생아의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의료법을 개정하였다.

남녀 성비 불균형의 원인이 남아선호사상의 결과 임산부들이 여아 출산을 기피하는 나머지 태아의 성을 감별하고 딸이면 임신중절을 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의료법 제19조의2로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을 삽입하였다.

즉, 태아 성감별을 금지하면 태아의 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아 임신중절이 줄어들어서 성비 불균형이 개선될 것이란 논리에서 이 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후인 2000년에 실시한 인구센서스 결과는 그 때보다 신생아 성비의 불균형은 더 심해진 것으로 나타났다(2002년 7월5일 각 일간지 보도).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은 성비불균형 개선이라는 목적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이미 이 규정이 제정될 때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 조문이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태아 성감별의 긍정적 측면만 소실된다고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여론은 이런 반대는 의사들이 돈벌이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이익만추구하려는 저의에서 비롯된다고 매도하면서 법제정을 강행하였다.

이 법에 따라 몇몇 의사들이 자격정지를 받은 일도 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이 규정의 제정과정은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당사자들이 매우 감각적이고 표피적으로 해결방법에 접근함을 보여 준다.

신생아 성비불균형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하지 않으면 장래에 회복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길 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표면화됐을 때 모든 국민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였고,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옳다.

그런 시점에서 태아 성감별 금지의 법제화가 하나의 해결방법으로 제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아하! 그거 좋은 방법이다"라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방법이 과연 실효성 있는 방법인지, 법이론으로도 타당성이 있는지, 다른 부작용은 없을 것인지, 따위를 합리적으로 논의해 보지도 않고 덜컥 법을 만들어 버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법이란 매우 논리적이고, 현실적이고, 실현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공정해야 하고, 효과보다 부작용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고, 반대로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일시적 방편으로 법이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기준에서 우리나라에 무수히 많은 각종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은 하루 빨리 정비되어야 할 법들이다.

현재 우리 의료계의 가장 중대한 현안인 의약분업도 이런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

어쩌면 건강한 의료제도를 위해서는 의약분업은 우리의 원대한 지향점이긴 하다.

그러나 의약분업의 당위성만 생각했지 위에서 말한 합리성, 공정성, 실현성, 논리성, 법철학적 타당성 없이 즉흥적, 감각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실시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덮어 두고 표피적으로만 접근한 것도 문제다.

현재의 법대로라면 같은 약사라도 같은 건물의 같은 층에서 개별 통로가 있으면 의원이 있어도 약국을 열 수 있고, 개별통로가 없이 같은 통로를 쓰면 약국을 열 수 없는데, 이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의료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이렇게 감각적, 즉흥적으로 제정되어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고, 지켜질 수도 없고, 지켜진다면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큰 각종 법과 제도의 정비가 선진국으로 가는 데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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