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입법예고된 "약사법시행규칙 개정안"에 의하면 시판 허가를 받기 전 임상시험중인 약이라도 환자에게 투약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한다.

이 제도는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이 작년 "글리벡" 및 "이레사"라는 항암제를 시판허가가 나기도 전에 환자에게 투여되도록 내린 초법적인 결정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한 소급적 입법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을 위협받는 질병을 가진 환자에게 허가전이라도 임상시험중인 의약품을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는, 선진국에서는 "Expanded access program"이라는 제도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앓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다는 인도적 목적이라니, 두 손을 들고 환영할 일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우려되는 점이 더 많다.

작년 "글리벡" 및 "이레사"의 도입과정에서 야기되었던 혼란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혼란을 야기하는 첫번째 이유는 이 같은 항암제들은 일부의 환자에서만 항암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항생제가 처음 개발되어 많은 생명을 구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글리벡의 경우, 만성골수성백혈병과 소화기육종환자의 일부에서만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부(복지부)가 나서서 실정법을 무시하고 사용을 허가하였고, 언론매체는 "암특효약"을 복지부(식약청)의 선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연일 보도하니, 암환자들은 그 약을 처방받기 위해 의료기관으로 몰렸고, 의사들은 적응대상도 아닌 암환자들의 처방요구를 거절하느라 큰 곤욕을 겪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그들의 심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나, 장기적인 효과가 검증되지도 않은 신약을 도입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소동을 벌여야 했었던 것인지 반문해 보고 싶다.
 
이레사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였다.

제약회사가 70명분의 약만 공급하기로 결정하자, 투약을 원하는 폐암환자중 일부만 추첨으로 가려내어 추첨을 통해 약을 공급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이 약은 비소세포 폐암환자의 18%에서만 일시적으로 종양을 줄이는 정도의 효과가 있다.

결국 이 소동을 통해 이득을 볼 가능성이 있는 환자는 70명의 18%인 13명 정도의 비소세포 폐암환자이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 특효약을 구하지 못한 환자들이 "그 약만 구하면 살 수 있는데…"하는 아쉬움을 품은 채 죽었고, 또 여전히 죽어 가고 있다.

그 수가 비소세포폐암 환자에만 국한하더라도 일년에 5,000명이 넘고있으며, 다른 종류의 암환자까지 포함한다면 50,000명이 넘는다.

10여명의 환자의 일시적인 생명연장을 위하여, 그릇된 정보로 수만명의 환자를 불행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제도가 옳은 것인지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몇 명 되지 않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제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제도가 더 많은 수의 환자의 손해를 전제로 추진된다면 이는 결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국외에서 개발된 새로운 치료제를 국내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 혼란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이같은 제도는 임상연구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 임상연구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유용하게 운영되고 있는 이 제도가 왜 우리나라에는 더 큰 혼란을 야기했을까?

암환자들 중 자신의 병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환자가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의사가 환자에게 병의 상태를 통보하는 것조차 보호자들이 못하게 막는 문화적 상황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이 쉽지 않음이 그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expanded access가 고려되는 연구용약제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임상연구중인 약제들로서, 아직 개발국에서도 허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임상연구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미흡한 자료에 근거하여, 국내로 반입이 허용된 연구용약제가, 개발국에서 추가적인 임상시험을 통하여, 최종적으로는 효과가 없는 약으로 판정될 수도 있다.

이 경우, 개발국에서는 최종적으로 인정되지도 못한 약제를 개발국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사용을 허가해준 모순이 발생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약의 도입을 서두르는지에 관한 제약회사의 입장은 글리벡의 도입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초기에는 적응환자에게 무상으로 공급하겠다며 인도적 차원의 접근인 것처럼 나서더지, 불과 수개월 후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고가로 보험약가를 책정해 주지 않으면 약을아예 한국에는 공급조차 하지 않겠다니 그 위선적 의도는 쉽게 노출되었다.

그런데, 왜 복지부가 이렇게 임상시험신약의 조기 사용에 적극적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혹시, 소수의 환자이지만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서는 선행을 홍보하기 위한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이 같은 일이 추진된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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