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란 산행은 끝없는 도전"

"당신이 왜 우리 검사성적을 평가하려고 하시오?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았지만 한국의학의 장래를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의료수요의 증가로 임상병리 검사건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등 의존도가 커지는 추세였지만 누구하나 검사결과의 정확성여부를 검증하려 하지 않았죠. 진단이 잘못되면 그저 검사 탓으로 돌리기가 일쑤였습니다."

거부감 딛고 외부정도관리 첫발

현촌(玄村) 김상인(75세)박사는 30년 전의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15개 대학병원 및 3개 종합병원 임상병리과 책임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한국의학의 질적 향상과 국민건강보호를 위해 정도관리(QA)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부 참석자들에게는 QA란 공동의 기준을 설정하고 편차를 대조, 공동으로 개선해야만 발전이 가능하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일부는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었지만 마지못해 참여의사를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인 1973년 3월, 14종목의 임상화학검사 QA 관리물질이 서울대병원 임상병리과에서 참여병원 18곳에 전달됐다. 이것이 외부정도관리의 효시다.

그해 9월까지 진행된 첫 QA 결과는 예상대로 엉망이었다. 도저히 공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우선 참여병원들에게만 공개했다. 그들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과가 엉망이라는데 충격을 받았다. 타 병원으로 환자이송 때 검사결과에 차이가 나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거부감을 드러내던 병원들도 이때부터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QA결과에 자극받는 병원들

"성적이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첫 결과를 다음해(1974년) 동경에서 열린 제1차 국제 정도관리 심포지엄에서 발표했습니다."
처음 시작한 QA결과에 자극 받은 참여병원들은 이 사업을 총괄할 단체를 만들어 적극 활성화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외국처럼 법인체로 하기에는 자본금 부담과 허가절차의 까다로움 등의 문제가 있음을 감안, 일단 학회 중심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1976년 8월 21일, 국립의료원내 스칸디나비안 클럽. 주요 병원의 임상병리 책임자 50여명이 모였다. 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학회의 발족 및 창립총회를 위한 모임이었다. 초창기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 44곳이 참여했다. 세계보건기구도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창립 2주년이 되던 78년과 그 2년후인 80년 두차례에 걸쳐 영국 퀸에리자벳 병원의 T.P.와이트헤드 박사로 하여금 특별강연 등 기술적인 전수와 상당량의 관리물질을 지원해주었다.

임상병리 독립운동

그러나 정도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임상병리 검사실이 정비돼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상병리 검사실에는 65년부터 배출된 정규교육과정의 임상병리사보다 야간고등학생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설과 장비도 열악한 시절이었다.
따라서 정도관리 발전의 원동력은 검사실의 질적인 향상과 이를 움직이는 임상병리과 및 교실의 독립이 우선 조건이었다.
"학회가 독립, 대한의학회 분과학회로 인준 받는 것이 이 문제를 신속하게 풀어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때부터 보다 적극적인 학회 독립활동이 시작됐죠."

그러나 병리학회와 의학회에 수차례 학회독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하고 요청했음에도 번번히 학문적인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전문의자격은 인정하면서 그 학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율배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래서 일단 학회를 창립하고 분과학회 인준은 차후에 생각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1980년 10월, 대한병리학회 추계학술대회가 열린 연세의대 강당. 그 한쪽 또 다른 강당에는 76명의 임상병리학계 독립투사(?)들이 모여 전격적으로 대한임상병리학회의 창립선언을 결행했다. 학회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의협 분과학회 정회원으로 등록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더 걸렸다. 반대하는 학회 설득과 여론수렴을 위한 공청회 등 또다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드디어 84년 3월 29일. 의협 분과학회 정회원으로 인준됐다. 이시기 이미 대부분의 지방 및 사립 의과대학에 임상병리학교실이 설치돼 있었으며 대세를 거스르지 못한 서울의대가 84년 9월, 연세의대가 85년 3월 뒤늦게 각각 교실을 설치했다. 독립운동은 종결되고 QA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전열이 가다듬어진 것이다.

日 지원으로 본격적 QA시행

김박사가 QA 개념을 깨우친 것은 59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70년 WHO의 추천과 지원으로 이스라엘 히부르대학병원에서의 유학시절이었지만 국내 여건상 실현이 불가능했다. 인력 시설 장비는 물론 관리물질도 구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김박사는 서울대병원만이라도 정확한 검사결과를 내보겠다는 이념으로 간단한 검체만 자체제작, 우선 내부 QA를 하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72년 일본이 본격적으로 QA를 시작했다. 현촌이 미네소타 유학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동경 국립제일병원 임상병리과 고자카이 노조부 과장이 주도한다는 소식도 확인됐다. 일본의 시작을 지켜보던 그는 곧 고자카이와 만나 우리나라에서의 QA시행에 관해 협의했다. 전폭적 지원을 약속 받았고 우선 필요한 상당수의 관리물질을 제공받았다. 이것이 국내 QA의 첫 발을 내딛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나라 QA는 이제 500여 검사실이 참여한 가운데 10개 분야별 분과로 나뉘어 연간 2회에 걸쳐 500여항목에 대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임상병리학의 선구자 역할

지리산 자락 경남 함양군 수동면에서 초등학생시절을 보낸 그는 부산으로 유학, 45년 동래공립중학교를 나왔다. 문학가를 꿈꾸며 계획했던 일본대학 유학은 광복이란 대사건으로 포기해야만 했고 3년간의 방황생활 끝에 48년 서울의대 입학시험에 합격, 의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55년 졸업 후 병리학을 거쳐 임상병리학이란 생소한 학문에 입문, 온갖 풍상을 겪는 선구자의 대열에 섰다.
"의사는 됐지만 환자를 진료하는 분야에는 애당초 생각조차 갖지 않고 연구자나 교수가 되기로 작정했죠. 그래서 기초의학 쪽을 선택했고 병리학에 입문한 것입니다."
병리학 조교시절인 59년 병원의 검사실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미국 국제협력처(ICA)의 프로젝트에 의한 미네소타대학 유학시절엔 혈액학, 그후에는 면역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전혀 없어서 관심있는 교수들과 초독회만 열심히 하는 등 거의 독학을 하다시피 했다. 68년 가톨릭의대 이용각 교수가 국내 첫 신장이식을 할 때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조직적합성검사를 해냈다.

장차 QA 성적은 요양기관의 질 판단 기본자료가 돼야 할 것이라는 그는 무엇보다 강요가 아닌 스스로 하되 보고서를 위한 것이 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검사실 종사자들이 재현성이 100%인 정확한 검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는 점을 QA의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또 검사를 의뢰하는 의사들과 마음과 생각이 통하고 격의 없이 논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에 오르는 일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지만 높은 곳에 이르면 넓고 먼 곳을 잘 볼 수 있을뿐더러 흐뭇한 성취감을 갖게 됩니다. 학문이란 산행 길은 더욱 더 높은 곳에 도전해야 하기에 끝없는 인내와 외로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인생의 산행은 언젠가는 흐뭇한 피로를 안고 하산해야 하며 새로운 하산길을 찾아 또 다른 기쁨을 지니고 돌아올 수 있으면 더욱 흐뭇한 일이죠. 산행길은 늘 진지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현촌은 인생과 학문의 길을 등산에 비유했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