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 정신과 치료기피…비용부담·질환악화 등 악순환

우울증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흔하게 겪는 질환 중의 하나이다.
최근 세계 보건기구가 사망률과 유병률을 함께 고려해 발표한 질병의 전반적 부담에 의하면 주요 우울증은 1990년에 모든 질환 중 4위에서 2020년 경에는 허혈성 심장질환에 이어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구의 5~10%가 주요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 가운데 3~5%는 치료를 요하는 중증 주요 우울증인 것으로 추정된다. 건강한 성인 5명 중 한 명은 일생동안 한번은 우울증을 경험한다는 것인데 다른 질환이 있는 경우 우울증 발병률은 이보다 몇배 더 증가한다.
우울증은 신체질환이 있는 환자에서 가장 흔히 동반되는 정신질환 중 하나로 뇌질환 등 신체질환을 가진 환자에서 우울증 발생빈도는 40%로 매우 높다. 특히 뇌질환에 동반돼 나타나는 우울증은 환자의 무기력을 유발해 재활의 의지를 꺽기 때문에 삶의 질이나 회복, 보호자의 삶의 질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뇌질환 후 발생하는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체계에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이차적 우울증이 많기 때문에 기존의 삼환계 항우울제보다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신경과 전문의들의 소견이다.
그러나 현재 정신과가 아닌 다른 과에서 SSRI를 처방하는 것은 60일로 제한돼 있다. 환자가 이 약을 60일 이상 복용해야 하는 경우 어느 과를 막론하고 정신과로 의뢰서(Consult)를 보내야 하며 환자가 정신과에서 처방받지 않길 원하는 경우 비급여로 처방해야 한다.
최근 신경과를 중심으로 뇌질환 후 발생하는 우울증에 대해 SSRI 처방일수를 제한하는 것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또 개원가에서는 우울증이 일차의료에서 두번째로 흔한 만성질환인만큼 과를 막론하고 항우울제의 처방일수 제한을 풀어 환자들의 진료 편의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정신과 전문의들은 타과에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은 결국 정신과에 대한 사회적인 부정적 편견을 조장한다는 입장으로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차성 우울증, 정신질환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서민의 건강권 확보를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의료급여 환자들의 건강권 향상을 위해서는 건강보험 환자들과의 차별적인 급여 적용 및 의약품 처방 규제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건강보험 환자와 비교해 의료급여 환자들이 각종 진료에 있어서 차별적인 급여 적용을 받고 있다는 것이 토론회의 요지였으나 항우울제의 처방 일수 제한 문제도 못지않은 이목을 끌었다.
현행 의료급여 수가기준 관련 고시에 따르면 프로작, 루복스, 파실 등 SSRI(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계나 이팩사, 삼발타 등 SNRI(Serotonin and Norepinephrine Reuptake Inhibitor·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차단제) 우울증 치료제의 경우 정신과 이외의 타과에서 기타 질환으로 인한 우울증에 투여 시에는 60일 범위내에서 인정하며, 60일 이상 투여시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처방 받도록 규정돼 있다.
이와 관련 김종성 울산의대 신경과 교수(서울아산병원)는 "독소조항"이라고 일침을 가하며 "뇌졸중 등 뇌질환으로 인한 2차적 우울증은 정신과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뇌질환 환자들이 신경과에서 지속적이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울증에는 원발성 우울증과 이차성 우울증이 있는데 뇌졸중이나 치매와 같은 뇌질환으로 인해 발생한 이차성 우울증은 정신과 영역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차성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물질 이상으로 오기도 하고 신체적 변화에 의한 심리적 상실감에 의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혼재돼있다.
뇌졸중 환자의 우울증상 중 특징적인 점은 무기력, 무감동이다.
따라서 제대로된 치료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활동을 기피하고 재활치료도 안 하게 되기 때문에 마비는 물론 폐렴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우울증 뿐 아니라 병적인 웃음이나 병적인 울음 등 감정조절장애도 신경전달물질의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만큼 SSRI와 같은 신경전달물질 조절 치료제가 효과적이다.

▲비싸게 먹거나, 치료 포기하거나
뇌질환 환자에서 우울증 및 유사증상은 뇌 손상에 의한 증상으로 흔히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 증상이다.
마비 등 증상에 따른 우울한 기분인 경우도 많으나 대부분은 시야장애, 실어증 처럼 뇌 손상에 의해 초래되는 증상으로 자살 충동 등을 주의해야 하는 주요우울증과는 다르다.
김 교수는 "뇌질환 환자들의 우울증은 다른 우울증약을 많이 쓸 것 없이 SSRI만 써도 증상이 완화되는데 신경과에서는 60일 밖에는 쓸 수 없다"며 "처방일수를 초과하면 환자를 정신과로 보내지만 경험에 미뤄보면 4/5의 환자들이 다시 신경과로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이유인즉슨, 신경과에서 치료효과를 봤던 환자들이 정신과에 가서 다시 진료를 받고 검사를 받는 수고로움이 있고 통상적인 정신과 영역 환자들의 우울증 치료에 기반한 치료를 받다보니 약의 가짓수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또 정신질환이 아닌 뇌질환으로 인한 증상임에도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는 것 자체로 환자들이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일부 약은 뇌질환 약과 상호작용을 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비용의 문제로 삼환계 항우울제등 보험약을 사용하는 환자들은 우울감의 개선보다도 다른 부작용을 호소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에 일부 환자들은 비급여로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신경과에서 계속 처방을 받거나 이것이 여의치 않은 일부 환자들은 우울증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치매 환자나 알츠하이머 치매, 혈관성 치매 등 뇌질환이 있는 경우 우울증의 빈도가 높아지는데 특히 노인이 대부분인 치매 환자의 경우는 기존의 삼환계 항우울제의 부작용이 심하다.
항콜린성 작용이 치매의 치료에 역반응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혈관계 부작용까지 유발하는데 치매 환자들은 약물에 의한 부작용이 나타나도 적절하게 표현할 능력이 없으므로 안전한 약물처방이 우선시돼야 함에도 비교적 안전한 SSRI에 대한 처방을 제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일선 신경과 전문의들의 입장이다.
파킨슨병, 간질 환자들도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존의 삼환계 항우울제는 간질 발작으로 더 악화시키고 약물 부작용이 심하며 흔한 질환은 아니지만 기면병의 경우도 SSRI가 모든 교과서에서 주지하는 1차 치료제지만 60일 이후에는 신경과에서 처방할 방법이 묘연해진다.
홍승봉 성균관의대 신경과 교수(삼성서울병원)는 "기면증은 워낙 환자 수가 적어서 그동안 제약회사에서 적응증을 추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적응증을 추가해 환자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이후 복지부에 처방일수 제한에 대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노령인구의 증가로 뇌졸중, 파킨슨병 등의 신경계 질환이 증가하리라는 전망도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게 한다.
김종성 교수는 "노인 인구 증가에 따라 뇌졸중, 치매, 파킨슨병 환자가 더욱 증가할 것"이라며 "뇌질환의 증가와 이에 따른 우울증 치료를 국가의 당면 문제로 여기고 적어도 뇌질환 환자에서는 처방일수 제한을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는 뇌졸중, 치매 등의 신경계 질환에 발생하는 우울증 및 유사증상에 대해 부작용이 없고 비교적 안전한 SSRI 처방을 보편화하고 있으며 만성 뇌질환에 특정기간 동안만 투여할 수 있다는 지침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높은 약가에 의존하는 수가체계가 원죄

의사 판단에 대한 수가 인정하고 약가 인하해야

요약기사 신경과 전문의들이 뇌질환 후 발생하는 우울증 환자 치료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부분은 현재 60일로 제한된 항우울제의 급여 일수 제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의사들이 정신과 기피 조장?
신경과 전문의들이 뇌질환 후 발생하는 우울증 환자 치료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부분은 현재 60일로 제한된 항우울제의 급여 일수 제한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SSRI와 같은 항우울제는 우울증상 뿐 아니라 감정조절장애에도 좋은 효과를 보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환자의 재활치료나 삶의 질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뇌질환으로 마비나 거동의 불편함이 있는 환자들이 약 하나 때문에 진료과를 두 군데 가는 것도 불합리하며 정신질환이 아님에도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는 것 자체로 심리적 부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진료를 받던 신경과에서 계속 처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강원의대 정신과 박종익 교수(강원대병원)는 "정신과 환자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시킬 수 있는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원발성 우울증이 아닌 이차성 우울증의 경우 정신과에서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차별에서 기인한 것으로 정신과를 기피하는 풍토를 조장하는데 의사들이 일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법에서 중요한 것은 공공복리로 일부 항우울제의 처방일수를 제한해서 우울증 치료가 안된다는 주장에는 법학적 근거가 없다"며 "정신과 진료에 대한 기피를 이유로 타 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하겠다는 것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 분명하며 인권적인 문제의 소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일면 처방권 제한이라는 점은 있지만 이보다 상위의 개념이 공공복리이고 환자의 인권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순수하게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인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적은 작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도 거론됐다.

한창환 학회 보험이사(한림대강동성심병원 정신과)는 "타 과에서 정신약물 사용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회 공청회에서 "어떤 의사들은 인권문제, 정신과 환자라는 낙인과 편견이 있으므로 정신과에 환자를 보내질 말고

다른 과에서 약을 처방해도 된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며 "너무나 당연한 정신질환의 정신과 전문의 진료에 대해 같은 의사들이 갖고 있는 오류와 편견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보험이사도 "우울증은 약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 아니며 전문의의 상담치료가 수반돼야 한다"며 "우울증은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치료가 이뤄져야 하며 항우울제가 제대로 처방되고 있는지에 대한 감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울증 진단 평가 모호해 과 간 구분도 애매
항우울제 처방일수 제한 문제는 작년 5월 경 정부 차원의 논의가 있었으나 제대로 결론을 짓지 못하고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번 토론회를 통해 다시 떠올랐다.

복지부는 정신과 이외 타과의 치매환자에 대한 SSRI와 SNRI 등의 항우울제 처방일수 제한이 임상현장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약제급여기준 개선 TF를 만들고 이를 폐지 또는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병원협회와 신경과학회가 복지부 TF에 현행 급여기준은 임상현장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치매환자, 사지마비와 편마비 등 환자의 특성을 고려해 정신과 이외 타과의 처방일수 폐지를 요청한데 따른 것.

그러나 신경정신과학회와 정신약물학회는 타과에 대해 우울증 치료제 처방일수를 제한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타당하다며 반대 입장을, 치매학회와 신경과학회는 항우울제 사용은 일차 진료의의 진단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라며 찬성하는 등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상반된 입장으로 일관했다.

이와관련, 심평원 약제기준부 김희정 부장은 "과 간 의견이 너무 달라 의견을 수렴해 일단 복지부에 의견을 제출했고 정부의 정책적인 결정만 남은 상태"라고 말했다.

김 부장에 따르면 당시 급여기준위원회에서는 항우울제를 정신과에만 허용하는 것은 특정과에 대한 제한이라는 의견에는 공감했지만 우울증 척도에 대한 평가가 모호하다는 것, 즉 전문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때문에 결정은 쉽게 내리지 못했다.

질병에 대한 접근 방향이 어느 과이냐도 고려해야 하는데 인지능력이 떨어진 치매환자 등의 우울증 진단 척도가 객관화된 것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박종익 교수도 "현재 이차성 우울증을 진단할 수 있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방법은 없다. 뇌질환 후 우울증은 신경전달물질의 문제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상실삼에 기인하기도 한다"며 "그러나 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은 없으며 원발성, 이차성 우울증도 결국 편의상 구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우울증약을 처방할 수 있는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문제를 제기한 병원협회도 "전문자격을 갖춘 의사가 처방할 수 있다"는 식의 광의의 정의만을 내려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평원 김희정 부장은 "우울증 척도의 판단이 모호하고 진단기준의 객관화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여의 범위가 확대될 수 있는 문제다"라며 "정부 차원에서는 보험재정이나 의료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 환자의 증가 폭이나 변수 등을 고려해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높은 약가가 주범, 터질게 터진 것
김종성 교수는 "이번 항우울제 처방 문제는 의료수가체계의 뿌리깊은 기본적인 문제에서 한가지가 터져 나온 것"이라고 토로했다.

의사들의 문진이나 상담, 진찰 등에 대한 수가는 없이 약가를 높게 책정해 부족한 재정을 메꾸다 보니 발생한 문제로 의사의 판단에 대한 수가는 없고 약가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환자에게 보다 좋은 치료를 하고자 하는 일선 의사들의 의견도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뿌리 깊은 수가체계 문제가 순식간에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의사의 전문적인 판단에 대한 수가를 인정하고 약가를 점차 인하한다면 최근 불거진 리베이트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국회 토론회에서 복지부 최영현 건강보험정책국장은 이 문제를 전문과 간의 일종의 의료전달체계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하며 신경과와 정신과의 역할분담 문제라는 언급을 했다.

정신과가 아닌 진료과에서 항우울제를 쓰다가 일정기간이 지나거나 효과가 없으면 정신과로 의뢰하도록 한 것은 정신과가 정신질환적인 측면이나 정신사회학적인 측면까지 보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전문적으로 치료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최 국장은 "동일한 항우울제에 대해 과 간의 처방권을 제한한다기보다는 정신과와 신경과의 역할분담 문제"라며 "두 과가 역할의 분담을 먼저 논의하고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역할정립이 된 후 필요하다면 정책은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한 문제에 대해 각 과가 정리하면 그 후에 결정을 고려해보겠다는 것으로 정부가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미온적 태도로 보인다.

건전한 재정운영, 보장성 강화, 적정한 의료수가라는 목표를 동시에 충족하기는 어렵겠지만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가 오히려 의료계의 영역 문제로 치부하고 과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