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의 겨울을 보내는 아쉬움인지, 봄을 재촉하는지 비가 며칠 계속 내리더니 꽃 시샘하듯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항상 다른 과보다 먼저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 하는 우리들 마취과 의사는 한 계절 늦게 사는 덕에 코트를 벗는 일정도 남보다 늦게 잡히곤 한다.

오늘도 계절에 맞추지 못한 어설픈 복장으로 병원 문을 들어서니, 여자 전공의 선생이 옆구리에 책을 끼고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직실을 향해 들어간다.
어제도 꼬박 밤을 새웠나 보다. 마취과는 이제 마취통증의학과로 명칭도 바뀌고 일반인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의사이신 아버지마저 반대하셨으리만큼 여전히 인기가 없는 분야이다.
그래도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신중하게,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며, 이 분야를 선택한 야무진 여의사들이다.

6년간의 의과대학 생활을 쉴 새 없는 수업과 수많은 시험으로 정신없이 보내고 이제는 수술실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수술복으로 무장한 채 밤이나 낮이나 말없는 환자와 지내다 보면 때때로 수면 부족으로 인간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본분마저 희미해지며 더욱이 나를 가꾸는 데는 나태해지고 소홀해지기 쉽다.

특히 밤을 지새우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잠시 당직실에 들어가 두 눈의 눈꺼풀이 채 닫히기도 전에 다시 아침 회의에 참석해야만 하는 육체적인 고달픔까지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말끔히 빗어 내린 머리와 미소어린 얼굴들은 요사이 우리 모두에게 하루의 즐거움이 되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와 타협하며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즐기면서 세상을 사는 이 시대에도, 그들은 한밤중에 응급실로 들어오는 환자들에게 불평 한 마디 없이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을 쏟아서 치료에 열중하고 더 큰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며, 환자가 회복되는 것만으로도 누적된 피로가 씻기고 삶의 활력을 느끼곤 한다.

그들을 볼 때마다 선배 여의사로서 한편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도 여의사로, 전문인으로서만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미적 감각도 언제까지나 함께 갖추었으면 하는 욕심이 난다.
최근 우리나라도 전문직 여성이 많아지고 있으며 특히 여자 의사는 한해가 다르게 늘고 있다.
전문인, 특히 여자의 경우에는 격식을 갖춘 옷차림이나 품위 있는 언행이 더욱더 환자에게 안정감이나 믿음을 주게 되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어느 보건의료 전문신문에서 호주의 설문조사에서 복장에 격식을 갖춘 의사의 경우 환자에게 보다 친밀감과 신뢰감을 준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한 것을 본 적 있다.
시대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애교로 받아줄 수 있는 몇 올 정도의 부분적인 머리 염색과 지나치지 않는 화장은 환자들로 하여금 삶을 사는데 조력자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지식을 소유한 듯한 멋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개나리가 필 때쯤엔 멋지게 차려입고 연극 한편 보고 재즈바에서 칵테일 한잔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의사상인지, 보람된 삶인지 더 많은 도움을 환자에게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여 보자.
그들이 힘들여 하는 일이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큰 자랑으로 여기며 나태하지 않은 의사로서의 자부심을 갖도록 하자.
집으로 가기 위해 책과 가방을 챙기며 이들 젊은 여의사들이 내일을 위해 공부할 수 있게 오늘 만큼은 응급수술이 없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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