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모스크바아카데미 컴퓨터공학 연구원이었던 파지노프는 1985년 테트리스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그는 새로 들어온 컴퓨터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평소 즐겨하던 러시아 전통 퍼즐인 "펜토미노"를 프로그램화시켰고, 스스로 그 재미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테트리스는 컴퓨터 게임에서 희대 걸작으로 25년째 자리매김하고 있다.
 약물에도 이처럼 우연한 발견으로 새로운 적응증을 얻거나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한 제품들이 있다. 지금까지 새로이 탄생 또는 변화한 약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녹내장 치료제가 속눈썹 연장제로= 비마토프로스트는 안방수 유출을 증가시킴으로써 안내압을 저하시키는 약물로 안압증가 및 개방각 녹내장 치료에 사용되는 점안제(루미간, 앨러간)다.

그러나 녹내장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속눈썹이 길게 자라는 부작용을 발견했고, 이를 응용해 속눈썹빈모증 치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라티쎄라는 이름의 처방약으로 지난 12월 미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프로스타글란딘 유사체인 비마토프로스트는 속눈썹의 성장주기 중 성장기(anagen phase)를 연장시킴으로써 좀 더 많은 수의 속눈썹이 성장기에 머물게 하여 속눈썹 길이를 연장한다. 그러나 정확한 기전은 규명되지 않았다. 제품용 특수용기를 이용해 윗 눈썹의 뿌리 부분에 아이라인을 그리듯 발라준다.

 눈꺼풀 발적, 일시적인 작열감 등 경미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2007년 9월 FDA는 "비마토프로스트를 과도한 용량 점안 시 시신경 손상으로 시력을 감소시키거나 실명할 수도 있다"는 경고문을 발표한 바 있기에 속눈썹 연장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한 남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서도 제품허가를 진행중이다.

 최근에는 비마토프로스트가 지방조직을 감소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안와 지방 감소로 윗눈꺼풀 고랑이 깊어지는 사례가 녹내장 치료를 목적으로 비마토프로스트를 점안한 환자들에게서 보고된 것이다.

명백한 기전은 보고되어 있지 않지만, 지방세포의 분화 및 생존을 억제함으로서 지방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 치료제에서 비만치료제로= 시부트라민(리덕틸, 애보트)은 1980년대 후반 당시에 존재했던 "Boots"라는 제약회사에 의해 항우울제로서 개발된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의 재흡수를 억제하는 약물(SNRI)이다. 그러나 항우울제로서 시부트라민에 대해 보고된 연구는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임상연구가 진행됐으나 결과가 부정적이었기 때문. 만일 성공했다면 삼환계 항우울제(TCAs)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한 최초의 SNRI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이 약물은 임상연구 도중 확인된 체중감소 효과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1997년 FDA로부터 비만치료제로 허가받게 된다.


 세로토닌은 감정조절 외에도 위장관운동과 식욕 등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뇌에서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 식욕이 증가해 비만을 부를 수 있다.

제조사측은 시부트라민이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임으로서 평소보다 적게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도록하여 체중감소를 이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선택적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SSRI)인 플루오세틴은 오히려 장기복용시 체중을 증가시키는 등 아직까지 세로토닌과 비만치료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론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인제의대 박영민 교수(일산백병원 신경정신과)는 "세로토닌의 다양한 수용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규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울증과 비만은 동반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에 어찌보면 시부트라민으로 두 질환에 대한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반면 세로토닌계열 약물과 병용할 경우 세로토닌증후군이 나타날 우려도 있다.

 세로토닌증후군은 세로토닌 증가 약물을 과용시 드물게 발생하는 질환으로 자극에 민감해져 쉽게 짜증 및 흥분을 내고 발한, 심계항진 등이 나타난다. 그밖에 항히스타민 효과를 가진 모든 약물은 H1 차단으로 식욕 및 체중증가를 유발하므로 병용시 주의해야 한다.

 ▲실데나필의 끝없는 변신= 1980년 후반 협심증 치료제 개발을 위한 구연산실데나필을 이용한 임상연구 결과 협심증 치료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약 개발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남성 환자에게서 특이한 부작용 증세가 보고됐다. 시험대상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년층 남성 상당수가 일종의 회춘 현상을 보인 것이다. 음경의 발기효과가 현저하게 두드러져 환자들은 오랜만에 만족스런 성생활을 누리게 됐다. 이후 FDA는 이 약물을 발기부전 치료제(비아그라, 화이자)로 승인했다.

예기치 못한 통제불능의 사건인 머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실데나필은 혈관을 확장시킬뿐 아니라 PDE5라는 호르몬이 혈관확장에 관여하는 cGMP를 분해시키는 작용을 방해해 발기상태를 지속시킨다.

 이후 실데나필의 혈관확장 효과에 대한 적응증 연구가 지속됐고, 2005년 폐동맥고혈압 치료약물로서 "레바티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FDA 승인 적응증 외에도 실데나필의 영역확장 연구보고는 지속되고 있다. 최근 Med Hypotheses에는 실데나필이 지방융해 자극, 혈관확장, 내피기능회복으로 셀룰라이트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보고됐다. 연구팀은 셀룰라이트 치료에 실데나필 피하 및 국소요법을 고려할 것을 권고했다.

셀룰라이트 환자는 피부혈류 개선을 위해 전기이온영동, 초음파, 열치료, 압력치료, 임파배수(lymphatic drainage) 외 약물요법도 시도되고 있으나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해 왔다.

 그밖에도 실데나필은 자궁내막의 두께가 비정상적으로 얇은 불임여성에 투여시 자궁내막의 혈액공급을 호전시켜 보조생식술의 성공률을 증가시켰다(International Congress Series 204;1271:19).

 SSRI는 성기능장애를 유발하기 가장 쉬운 항우울제로 치료 환자의 30~60%가 약물성 성기능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The Annals of Pharmacotherapy 2002;36:1577). 이 경우 약물의 교체·감량 또는 성기능보조제 복용이 치료법으로 제시된다. 이와 관련한 임상연구 자료가 비교적 많은 약물은 실데나필로 발기능력 개선에 대한 효능이 어느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한편 항우울제를 복용중인 여성 환자에서도 성기능장애 개선효과가 감소했다는 연구가 JAMA에 보고된 바 있다.

 ▲피나스테리드, 전립선비대증과 탈모 치료를 동시에= 테스토스테론은 5α리덕타제에 의해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으로 변한다. DHT는 전립선상피와 간질세포의 핵에 존재하는 남성호르몬 수용체에 결합하고 상피세포성장인자(EGF), 섬유아세포성장인자(FGF)에 관여하여 전립선의 비대를 유도한다. 또한 유전적으로 이 물질에 민감한 사람에서 머리카락의 생존기간을 단축시키고 모낭을 위축시켜 건강한 모발을 탈모 모발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5α리덕타제를 억제함으로써 DHT 농도를 감소시키는 피나스테리드는 이같은 기전을 통해 현재 두가지 질환의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전립선비대증 치료(프로스카, MSD) 외 피나스테리드가 탈모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밝혀진 것은 1950년대 였다. 당시에는 탈모 인구가 적었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으나, 이후 탈모 인구가 급증하며 발빠르게 탈모치료제(프로페시아, MSD)로서 1997년 FDA 승인을 통해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립선비대증 치료제는 5mg, 탈모치료제는 1mg이 사용된다.

 ▲한갓 세균 독소에서 미용성형의 중심으로= 그밖에 상한 통조림에 기생하는 세균에 불과했던 보툴리눔 독소는
1960대 후반 사시 교정 효과가 확인된 이후 미용 목적의 주름치료, 안검경련 치료, 사경 및 경추 동통 치료, 겨드랑이 다한증 치료 등에 대한 적응증을 FDA로부터 승인받았다.

 그밖에도 뇌졸중 후 경직, 편두통의 치료목적으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파지노프는 "게임 개발에는 컴퓨터공학, 심리학 등 수많은 학문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발상에 의한 결과물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약물에도 "역발상의 힘"을 부여하기 위해 제약회사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의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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