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신임 WHO 사무총장

"국제적으로 인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우리정부가 지원하는 결핵 및 말라리아 치료약을 북한에 전달하고 작년 8월 일시 귀국, 기자와 만난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 보건계의 최고위급 인사였다.

그가 20년 만에 최정상에 오르는 꿈을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니다.

76년 서울의대를 졸업한 그는 의대 학창시절 틈틈이 안양의 나자로 나환자 마을을 찾아 봉사와 진료 지원을 하면서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가톨릭 신자로 봉사활동차 한국을 찾은 동갑내기 일본인 레이코를 만나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평범한 의사의 길을 가지 않기로 결심한 그는 나병 연구를 위해 하와이 주립대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뒤 미국령 사모아의 린든 B 존슨 열대의료원에서 나병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때 만난 당시 WHO서태지역 나카지마 히로시 사무처장의 권유로 83년 WHO의 정식 직원이 된다. 나카시마 처장은 후에 WHO 사무총장에 오른다.

초임발령은 피지의 나병관리 책임자. 누구나 선뜻 가려하지 않는 오지였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어려움을 견뎌냈다. 당초 3∼4년만 근무하리라 마음먹었으나 WHO의 붙박이가 돼 버렸다.

버려진 이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 그의 인생 행로를 꽉 붙잡았다.
 
오지근무 덕분인지 4년만인 87년 서태지역 질병관리국장으로 승진, 마닐라생활을 하게된다.

94년 제네바본부로 영전한 그는 백신사업국장, 98년 결핵국장과 브룬트란트 사무총장 보좌관을 겸임하게 된다. 백신사업국장시절에는 세계아동백신운동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소아마비 퇴치에 전력, 감염확률을 세계인구 1만명 당 1명 이하로 낮추는 공을 세운 그에게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붙여주었다. 또 97년 유명 테니스선수 마르티나 힝기스가 백신연구기금 7만5,000달러를 기부하도록 함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불꽃튀는 선거전

지난 1월 21일 7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1∼2위의 지지표를 얻으면서 5명에 포함된 그는 최소 득표자 1명씩을 탈락시키는 방식인 본선에서도 줄 곧 선두를 유지했다.

결국 4차 투표를 거치면서 마구엘 모쿰비 수상(모잠비크), 훌리오 프랭크 전 보건부장관(멕시코), 살람 보건부장관(이집트) 등 막강한 3명의 후보가 탈락하고 피요트 유엔에이즈퇴치계획 사무국장(벨기에)과 마지막 결선에서 맞서게 됐다.

그러나 5차에서 16대 16, 6차에서도 동수 득표를 하는 등 피를 말리는 치열한 대접전이 벌어졌다.

결국 7차 투표에서 한 표가 이종욱 박사 쪽으로 돌아서면서 극적으로 결판이 났다. 17대 15가 된 것이다.

후보중 유일하게 20년간 WHO를 위해 헌신 봉사한 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후원회·정부 전폭 지원 큰 힘

이번 쾌거는 그의 WHO 20년간 쌓은 업적과 공헌이 바탕이 되기는 했지만 국내 후원회(회장 권이혁)의 적극적인 지원과 정부차원의 전방위 외교가 큰몫을 했다.

지난해 11월 22일 선거를 두 달 가량 앞두고 보건의료계 신상진 의협회장, 김광태 병협회장, 이길녀 서울의대동창회장(가천길재단회장) 등 50여명의 인사들로 결성된 후원회는 250여 기관과 개인이 참여하는 기금을 마련했다.

정부도 청와대, 복지부, 외교통상부를 주축으로 선거기획단을 조직, 각 후보의 동향분석을 통한 각국별 맞춤 지원을 하는 한편 김성호 복지부장관을 이례적으로 특사자격으로 파견, 미얀마, 중국, 브라질, 일본 등 집행이사와 각국 보건부장관 등을 직접 만나 지지와 협력을 요청했다.

이기호 청와대경제특보와 신언항 복지부차관, 문경태 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엄영진 후원회 집행이사(포천중문대), 신영수 심평원장 등 관련 인사들이 각 집행이사국을 수시로 순회하며 선거전을 주도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쿠바의 카스트로 대통령이 상대 후보를 지원할 정도로 치열한 선거전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당선됐다는 것은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한 복지부 당국자는 말했다.

복지부는 이종욱 박사의 취임 시까지 소요되는 예산과 인력을 지원, 성공적 취임과 업무인수인계를 돕기로 했으며 WHO에 대한 우리나라 기여도를 확대하는 방안도 마련중이다.


국제사회 한국 위상 한층 높아져

우리나라는 이제 건국후 최초로 선출직 세계기구의 수장을 배출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특히 보건분야의 영향력은 한층 증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때 작고 가난했던 나라로 선진국의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이제는 지원국가로 당당히 나서고 또 이를 선두에 서서 총지휘하게 된 것이다.

또다른 큰 소득으로는 무엇보다 남북교류의 적극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박사는 당선 직후 "북한 등 의료취약 국가에 기초 의약품 생산시설을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결핵과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두번이나 방북했을 정도로 북한 동포들을 위한 일에 열성을 보였다.

이같은 그의 강력한 대북 지원 의지는 새정부의 대북정책과 맥을 같이 할 것으로 예상됨으로써 북한의 보건산업 기반시설 구축과 관련한 기술적, 물적, 인적 지원이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또 WHO의 중개로 남북한 간 보건의료사업이나 인도적 지원사업, 말라리아 등 전염병 공동 연구, 질병 퇴치사업 등이 활기를 띠고 한의학의 기술 교류 사업 확대 등이 전망된다.

WHO가 연간 막대한 양의 의약품과 백신을 구입한다는 점에서 국내 제약산업이나 생명공학계에도 큰 파급효과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당선 직후 "WHO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커 책임이 무겁다"며 "무엇보다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등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이들과 상의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투명하고 효율적인 기구 운영을 통해 모금운동을 확산하고, 분권화를 통해 WHO 예산의 75%를 현장에서 질병과 싸우는 전세계 6개 지역사무소에 배당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박사는 평소 WHO의 밀실행정 및 관료주의에 대해 올곧은 목소리를 높여왔으며 정치적 힘에 의해 정책이 입안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옴으로써 "WHO 조직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변혁이 요구된다"는 개혁적인 공약을 제시했고 이를 실천하는데 크게 비중을 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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