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걷힌 소비시장…의료기 투자 냉각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관리를 받기 전인 1996년, 그러니까 약 6, 7년전의 일이다.

미국 볼티모어의 유명 의과대학 4학년 학생이 우리 병원 소아신경외과 나에게 선택과정을 신청해 왔다.

우리나라에 연고가 있거나, 아니면 드물게 동양의 신비에 호기심을 갖는 경우가 아니면 미국 출신 학생이 우리나라에서 선택과정을 이수하고자 신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소 의아했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였다.
 
어느 가을날 내게 찾아 온 그에게 나는 그런대로 신경을 써 가면서 신경외과 수술과 신경해부 지식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묻기도 하면서 우리 병원 의학 및 의료 수준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도록 나름데로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는 미국 유명 의과대학 4학년 학생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생각보다 의학 공부에 관심이 적은 것 같았다.

하루는 저녁을 같이 하면서 왜 우리나라에서 선택과정을 이수하기로 하였는지 물어 보았다.

개발도상국의 어려운 의료 환경을 체험하기에도, 첨단 의학을 견학하기에도 우리나라가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특별히 환자 수가 많은 질환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답은 내게는 충격적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으나 너무나도 우리의 의료기기 현실을 정확히 짚는 것들이었다.

그는 보스턴의 유명 대학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의 의과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의사가 되는 길보다는 그 동안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의료 관련 사업을 하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선택의학 과정을 해외에서 이수하면서 실제로 의료기기, 의약품, software 등의 시장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로서는 의료기기가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였고, 한국이 가장 훌륭한 시장으로 판단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유로는 ①상당한 구매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가의 의료 장비일수록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경쟁적으로 고가의 의료 장비를 갖추고 이를 병원의 위상 제고 및 환자 유치 수단으로활용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의료보험에 해당되지 않는 미용 관련 장비는 없어서 못 팔던 때였다.

②우리나라는 의료기기의 경제적 구매 능력을 갖추고 수요가 많은 데에 반하여,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 스스로 만드는 의료기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예로서 일본은 그들에게 있어서 별로 매력이 없는 시장이라는 것이다.
 
③다른 나라에 비교하여 우리나라는 의료기기 판매가 훨씬 수월하고 시판 후 관리도 편하다는 것이다.
 
비약이 있겠지만 내게는 "한국을 외국 의료기기 회사에서는 봉으로 보고 있다"고 들렸다.
 
그리고는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 대형 병원 몇 군데의 이름을 스스로 대면서 구경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였다.

시장의 규모와 성격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갈등을 느꼈지만 도와 주었다.
 
그는 떠나기 전 나와의 면담에서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의 의료기기 시장이 매우 매력적임을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이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 관리 하에 들어가면서, 엄청난 환율 상승으로 국내 의료기기의 상대적 경쟁력 강화의 시기를 맞게 되면서, 여러 병원의 교수들과 의견을 모은 바, 이 기회가 우리나라 의료기기 개발에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고, 일선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생각하게 되었고 작은 모임을 만들어 한시적으로 3년간 만이라도 활동해 보기로 하였다.

주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었고 우리도 이를 구체화하고자 미약하나마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다행히 우리나라가 1년여 동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일부 부문에서는 경제 활동의 뚜렷한 회복의 징후를 보였고 몇 몇 의료기기 회사는 승승장구하면서 우리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국내 신약 개발 1호가 발표되고 생물과학 분야의 벤처 회사들도 상한가를 치자 우리는현실감을 못 느끼면서도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인가 보다 하며 의료 관련 산업의 눈부신발전과 도약을 눈 앞에 두었다고 장밋빛 꿈을 조심스럽게 꾸게 되었다.

그러나 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소위 "거품"이 빠지고 경제계가 재정비되면서 의료 기기 관련 산업이 침체되는 냉엄한 현실로 돌아 온 것이다.

게다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던 의약분업 사태는 반년 이상 기간에 걸치는 의료 기능 마비를 초래하였고 임상의학자들은 의학적 활동을 모두 접고 최일선 의료 현장에서 환자 진료에 전념하여야 했다.

반년 이상의 기간 동안 의료 활동에 공백이 생기자 각 병원들의 경영상태는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는 등 매우 악화되었고 따라서 각 병원들의 의료 기기에 대한 투자를 현저하게 위축시켰다.

이제 그 소용돌이에서 조금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의료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떠 올려 보아도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시피 하다.

일부 간단한 의료 용구는 국산화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기계적 부품을 요하는 고가의 의료 기기는 그 시장을 거의 국외에 내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 관련 산업은 바람같이 일어나려다가 주저앉아도 보았다. 잘 나가는 집단도 잠시 슬럼프가 있는 법이다.

바람도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그냥 일어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있었으니까 바람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는 하나하나 짚어가며 각 분야에서 착실히 기초를 다져가야 한다.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잘 생각하고 전략을 정비해야 한다.

특히 의료 용구 관련 기업은 규모가 크지 않기에 기술력과 시장성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의료 현장의 소리에 기초를 둔 기술력을 갖추어야 한다.
 
의사들도 의료 용구 개발에 대하여 교감이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 개발자로서, 건강하고 교육적인 수요자로서, 충고자로서 의사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또한 인허가 업무, 윤리적 검토, 의료보험 적용, 수가 책정 등의 제도적인 뒷받침에 있어서도 의사들이 의견을 내야 한다.

분야를 망라하여 관련자들이 함께 모이는 협의체가 중요하며 여기서도 실질적인 소비자 그룹을 대표하는 의사들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이미 형성된 몇몇 협의체들이 활성화되어, 의료 용구의 개발을 촉진하는 데에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아직도 그 방문 학생의 이야기가 머리를 맴돌고 있다. 5년이 지나면 사정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기대는 아직도 많은 부분을 꿈으로 남겨 놓고 있다.

나는 의료 기기 개발의 문외한인 사람이지만 우리나라 의학자로서, 우리나라 의료 현장에서 일하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의사들이 우리나라 의료 관련 산업의 운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기에, 목마름도 느끼고 책임감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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