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 앞세워 제약사 지원길 막아놔


긴축경영 돌입따라 참여 부스 절반 "뚝"

 연말이 다가오면서 각 의학회 및 단체들의 학술대회도 마무리되고 있으나 상당수 학회가 예년에 비해 학술대회 규모나 참가 부스를 축소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한파에 학회장도 얼어붙은 것이다. 여기에 지정기탁제, 공정거래자율준수프로그램(CP) 등 불공정거래를 막기 위한 장치들이 의학 발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학술대회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학회에 대한 제약사의 지원이 인색해진 것은 작년 리베이트 파문 및 일부 의학회에 대한 세금 추징에서 불거졌다.

 제약사의 리베이트 관행이 뭇매를 맞자 제약협회는 올 2월에 학회 및 학술대회에 직접 지원을 금지하는 대신 제 3의 기관을 통해 지원키로 하는 지정기탁제 도입을 선언했다. 여기에 경기침체 및 환율 상승으로 제약사들이 긴축경영에 돌입하며 학회 지원 예산 자체를 축소시킨 것도 한 몫을 했다.

 모 다국적제약회사의 관계자는 "경기불황으로 학회지원 규모를 작년의 70% 수준으로 축소, 가장 비용효과적인 학회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며 "의학회 내부적으로 세부학회 남발을 막고 학회통합 등으로 군살빼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안과학회는 올해 100회 기념학술대회라는 의미있는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자축행사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이번 학술대회에 60여개의 광고부스가 설치됐지만 이는 학회가 부스 설치비를 예년의 절반 정도로 줄이며 많은 업체들의 참여를 도모했기 때문.

 이하범 이사장은 "안과 진료에서 약물치료가 증가추세라 관련 업체들도 늘어났지만 경기불황으로 어려운 것으로 안다"며 "부스 설치비를 내리고 회원들의 식사도 저렴한 메뉴로 선택해 실용적인 학술대회로 치렀다"고 설명했다.

 당뇨병학회나 심장학회 등 약물치료 중심의 학회를 제외한 소규모 학회나 기초의학 및 외과계열의 경우 타격은 더 심한 상황이다.

지난 11~14일 9개 세부학회와 통합학술대회를 개최한 외과학회는 회원수 5000명에 이르는 초대형 학회지만 이번 학술대회에 참여한 광고부스는 28개 업체에 불과했다. 작년에도 32개 업체만이 참여했지만 이조차도 올해들어 12% 줄어든 셈이다.

 올해부터 춘계학술대회를 비롯, 세부학회 학술대회를 폐지한 비뇨기과학회는 팍팍한 살림살이에 학회 자체적인 수익모델을 마련하겠다고 밝히며 재정확보를 위한 자구책을 구상하고 있다.

 일년에 3~4번 열리는 무리한 학술대회 일정을 소화하느라 회원들의 진료와 수련에 영향을 주던 부작용은 해소됐으나 그만큼 업체의 후원을 받을 기회도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의학회 뿐 아니라 규모가 큰 단체들도 예년에 비해 허리띠를 졸라맨 채 학술대회를 치렀다.

 지난 13~14일 대한병원협회가 주최한 병원관리종합학술대회에 부스를 설치한 업체는 40여 곳. 통상 병원관리종합학술대회에 70여 업체가 부스를 설치했던 것에 비교하면 올해는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황이다.

 학술대회의 패러다임이 국제화로 전환되는 추세지만 환율 폭등으로 해외 연자 초청에도 제동이 걸렸다.

지난 19일 국제의료관광컨퍼런스를 유치한 한국관광공사 정진수 전략개발팀장은 "이번 컨퍼런스에 해외 바이어 80여 명을 초청했지만 환율 폭등으로 예상을 훨씬 초과한 금액이 소요됐다"며 "바이어 명단을 재선별하는가 하면 참가를 원하는 바이어들도 일부는 초청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모 학회 이사장은 "내년 학술대회를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해외연자 섭외에 들어가야 하는데 현재의 예산을 감안하면 올해의 절반 수준도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편 일부 학회에 수억원대의 세금이 추징된 것이 알려지면서 학회에 법인화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재단법인 1차의료기관"이란 명칭으로 법인화를 추진 중인 대한가정의학회 신호철 이사장은 "세무상의 목적으로 법인화를 시도하는 학회들이 많지만 승인은 낙관할 수 없다"며 "사업목적이 분명해야 수락하겠다는 것이 복지부 입장으로 국민건강 증진을 위한 사업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학자들의 단체이자 의학 발전을 위한 연구활동에 매진해야 하는 의학회가 재정 문제로 학술대회 규모를 축소하고 급기야는 학회 운영을 위한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하고 법인화로 전환하는 등 학회의 본질이 퇴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시 10개월이 지나도록 세부 규정이 마련되지 않아 사실상 실효성을 잃은 지정기탁제도 투명한 학회 지원과 공정거래를 실현하겠다는 제약업계의 의지를 꺾고 있다. 실제 올해 춘·추계 학술대회에서 한국의학원·한국의학학술지원재단을 통한 지정기탁제를 통해 학회를 지원한 제약사는 한 곳도 없다.

 현재 정부 차원의 의학 연구 지원은 한정적이고 지원 수준도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하면 너무나 미약하다.

이런 가운데 업체의 자율적인 학술지원마저도 제한하는 것은 결국 국내 의료 수준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학술대회는 의학발전의 기틀이 되는 의학계의 중요한 잔치다.

제약사의 리베이트 관행이 신약 개발 등 제약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는 점에서 공정거래 규정은 불가피한 시대의 조류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학회가 재정문제로 학술활동이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의학계의 미래 또한 보장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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