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학적 형상으로 재탄생한 "순수미술"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슈프리마티즘 선포
모든 관능적 묘사 배제한 순수·지적 구성


 키예프 출신의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는 키예프 미술학교와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나 야수파 그리고 입체파나 미래파의 양식을 취한 소위 네오프리미티즘(neoprimitism) 화풍의 그림을 농부를 대상으로 주로 그렸다.


그림 1. "자화상"(1908)
상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이러한 양식으로 그린 그의 작품들 중에 사람의 얼굴을 그린 자기의 "자화상"(1908)이 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 혈기 왕성한 모습으로 작품 활동을 맹렬히 하고 있을 때의 모습으로 눈은 한 곳을 집중해서 응시하고 있으며 굳게 다문 입과 미간에 잡힌 세로로 된 두 줄기의 주름으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는 모습인데 아마도 추상화로 전환하려는 것을 이 무렵부터 고뇌하였는지도 모른다.

 1911년부터는 러시아의 입체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912년에 파리를 여행하고 돌아온 말레비치는 레제풍(프랑스의 추상화가)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면서 자기 방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감정이나 연상을 배제하고 "순수 미술"을 추구하기 위해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을 창안하는데 고심하였다.

 이것은 예술운동이라기 보다는 실존의 양면성을 반영하는 정신적 태도로 여겨지는데 구성적인 기계미, 기하학적 공간구성을 목표로 하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추상주의적인 그림이라 하겠다.


그림 2. 농촌의 소녀"(1912~13)
암스테르담, 시립 근대미술관


 이 무렵의 그의 작품들 중에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는 "농촌의 소녀"(1912~13)가 있다.

이 그림은 제목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장미꽃의 입체화인지 알 수 없을 정도 추상화 되었는데, 단지 두 개의 동그란 원형이 그러져 있어 이를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그 중간부가 코, 그리고 그 밑이 입에 해당되는 등의 억지적인 해석을 하게 하는 그림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의 세계에 있어서 인간을 주인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추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서 감정을 빼고 기계와 통합함으로서 기계를 능가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1915년 그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트램웨이 V" 전시회에 참여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독특한 화풍인 "슈프리마티즘(suprematism, 절대주의)"을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도 러시아 전위파 예술인들과 교류하면서 "입체파와 미래파에서 절대주의까지"라는 저술을 그림과 함께 발간하였다. 이로서 말레비치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요소로 이루어진 그림을 발표한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

 그는 미술에서 모든 관능적 묘사를 배제하고, 순수하며 지적인 구성의 작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즉 모방이 아닌 창조에 의해서 "우리 시대의 금속문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창된 슈프리마티즘의 기본 형태로 미술가의 환경에 의한 조건부 반응을 깨뜨리고,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 있는 새로운 실제를 창조하려 했다"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던 그 화가가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슈프리마티즘은 기존 일체의 형태, 색깔, 의미나 형식을 초월하며 문화적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순수형상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오브제를 거부하는 순수형상은 단순한 기하학적형상들의 조합으로 표현되었다.

 하얀 바탕에 까만 사각형, 까만 사각형은 그의 순수느낌을, 하얀 바탕은 느낌을 넘어서는 공(空)을 표현했다. 사각형, 원, 크로스, 검정, 하양, 빨강, 초록, 파랑…, 점점 복잡해져 갔다.



그림 3. "슈프리마티즘(2차원의 자화상)"(1915)
암스테르담, 시립 근대미술관

 그의 작품에 "슈프리마티즘(2차원의 자화상)" (1915)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채색기라 정의한 시기에 속하는 그림으로 선명한 색의 사용을 통해 그의 초기 작품에서 강조하였던 흑백 이론의 것보다는 다소 후퇴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미술세계에서 2차원을 탐색한 것으로 이러한 탐색은 초점이 없고 비대칭적인 공간을 통해 나타냈으며 이것은 슈프리마티즘의 사상을 잘 표현하였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차원의 그림이며 자기의 2차원 자화상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말레비치의 이러한 화풍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로 이어졌고 마야코프스키와 함께 바우하우스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피카소에서 칸딘스키로 이어지는 다리, 즉 그 다리위에 슈프리마티즘을 외친 말레비치라는 화가가 서 있었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이 성공하자 당시의 러시아 전위 예술인들은 이를 환영하여 볼셰비키를 지지하였으며 말레비치도 이에 가담하였다.

즉 자기의 상상력에 힘을 불어넣어준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런 결과로 그는 모스크바 제1 응용 미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샤갈의 후임으로 비데브스크 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혁명정부는 예술을 박물관 밖으로 끌어내어 길거리로 나오게 하여 길거리를 장식하고 대중 공연을 조직하였으며 영웅적 혁명적인 작품을 만들 것을 요구 하였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주장은 달랐다. 즉 예술이 기계문명에 맞추어지고 공리적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으며 예술가와 기술자간의 어떤 편의상 결합도 부정하였다.

 진정한 창작품은 시대를 넘어 영원성이 부여되는데 비해 과학과 기술의 발명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의식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잠재의식으로 보이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구축주의와 산업미술에 밀리게 된 미술가들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자기의 이론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1926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칸딘스키를 만나 "비구상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소련정부가 현대 미술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말레비치와 그의 미술은 파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1928년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며 그것이 그의 소련사회에서 공식 평가의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1930년에는 반동분자라는 협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즉 미술정책의 일대전환으로 더 이상 미술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상 페테르부르크로 낙향하여 자유를 잃고 세상에서 잊혀진 채 그림을 그리며 지내게 되었다. 그 시기의 그림들 가운데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작품을 골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림 4. 사람의 머리"(1928~32) 상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그림 5. "농부의 머리"(1928~32) 상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그의 작품 "사람의 머리"(1928~32)라는 그림과 "농부의 머리"(1928-32)가 있는데 전자는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인데 자세히 보면 어딘지 모르게 슬픔을 안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아마도 그 시기 자기 자신의 슬픔을 표현한 것 같다.

후자인 "농부의 얼굴"에는 얼굴에는 구조가 하나도 없고 머리털과 수염만이 무성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를 모르는 볼셰비키들과는 5감각기를 통해서는 아무런 교류가 되지 않는다는 심정을 토로한 것 같아 무표정으로 오히려 강한 항의의 의
사 표시를 한 것 같이 느껴진다.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 형태로서의 직선은 그의 기하학적 표현의 중요한 바탕인데 그 직선은 그대로 살아있으며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요소이며 외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두 그림이 모두 과거의 미술을 부정하는 의미를 내포한 작품들이다. 그 후 그는 구상화, 초상화, 풍경화로 되돌아갔는데 그중에서 얼굴과 그 표정을 그린 것은 "여인의 초상"(1932)이다.

그림 6. "여인의 초상"(1932)
상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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