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전해준다. 미래를 암시하거나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텔레파시를 통해 보는 것 같이 전하는 꿈, 매우 무서웠던 때의 광경이 되풀이 되는 꿈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해석은 어려운 문제이기에 현대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은 감정을 나르는 통로이기 때문에 일상생활보다도 훨씬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나타난다.
 옛사람들은 꿈은 신이나 성령에서 보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꿈의 스토리가 자기의 발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의외성을 지니고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꿈이 아무리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전개되어도 그것은 자기의 것이며 자기 이외의 것이 관여된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 꿈은 언제 어떻게 무의식 속에서 나타나 드라마화 되는지가 궁금해진다. 또 그것이 목전에서 전개되는 감상적인 드라마인 이상 우리가 잠자고 있어도 그 꿈의 세계에 말려들어 공감하고 그것에서 무엇을 느끼는 것이 자연 상태로서의 꿈의 의미이다.
 또 꿈의 주제는 누구에게나 자기 의식적인 이성 보다는 감정에 영향 미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여기게 될런지 모른다. 즉, 꿈은 우리의 의식을 벗어난 미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전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마음속에 간직되었던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꿈은 마음속에서 맴돌던 감정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꿈 가운데 좋은 것은 쉬 잊게 되지만 악몽은 두고두고 여운을 남기고 그것도 계속 반복 될 때는 건강을 해칠 정도의 정신적인 충격이 되며 고통이 된다.
 스위스 출신으로서 영국에 귀화한 화가 퓨젤이(Henry Fuseli 1741~1825)는 셰익스피어와 밀턴, 단테, 호메로스, 중세 전설 등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페스트와 관련된 잔혹한 이야기와 묵시록적인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 그는 "예술에서 가장 탐사되지 않은 부분은 꿈"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끝없는 호기심을 지닌 화가였다.
 퓨젤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악몽`(1781, 1790, 프랑크푸르트 괴테 박물관)이라는 두 그림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을 소재로 한 꿈에 대한 그림이다. 이 주제의 작품은 어떤 특정한 문학작품에 의해서 작품의 계기가 마련된 것 같지는 않고 단지 당시 영국의 유령 이야기를 참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아래쪽에는 잠든 여인이 누워 있는데 상체 중간 부는 침대에서 떨어지고 있으며 목과 두 팔은 뒤로 젖혀져 있고 다리는 구부리고 있어 잠자리를 몹시 뒤척이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가 지금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을 표현 한 것이다.
 그녀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는 그녀의 가슴 부위에 아주 영악해 보이는 한 작은 괴물이 앉아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몸을 굽어보고 있고, 배경에서는 한 마리의 횐 말이 커튼을 헤치고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그 말은 눈동자가 없는 장님 말이어서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할런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나머지 공포감마저 들게 하는 것으로 악몽을 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퓨젤이의 그림은 우리의 의지가 약해지거나 확신을 잃거나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여러 형태의 괴물이 꿈속에 출현해서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특히 이런 공포를 조장하는 시대적인 배경도 관여된다는 것이다. 퓨젤이는 자신의 시대에서 이런 징조를 보았고, 거기서 느낀 전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사악한 기운에 겹겹이 둘러싸여 긴박한 불안과 공포감에 사로잡힌 악몽을 꾸는 것은 누구나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의 악몽 속에 출몰하는 기괴한 존재들을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것들은 어딘가에 있다가 우리의 의지가 약해지거나 확신이 무너질 때 그것들은 우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처럼 우리의 꿈속을 헤집고 다녀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독일의 화가 그로츠(George Grosz, 1893~1959)는 사회의 악몽을 잘 표현한 화가이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회에 대해 이의신립(異議申立)과 같은 것으로 나의 작품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 헐뜯고 모략하여 병들어 보기 흉한 것으로 충만해 가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라고 하였는데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면에는 그의 생활사가 말해 준다.
 그로츠는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촌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그의 아버지는 선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6세 때 사망하였다. 가정부를 하는 어머니에 의해 겨우 생활하는 가운데 그래도 장학금을 받아 드레스덴 및 베를린의 미술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였는데 점차 군대가 싫어지고 독일적인 것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6개월 만에 제대 하였으며 그 후로는 자기 이름을 독일식 Georg `게오르크`에서 영어식의 George `조지`로 바꾸었으며 1917년에는 재차 군에 소집되었으나 신경병이라는 이유로 곧 제대했다.
 이렇게 제대한 그가 그린 것이 `장례식 - 오스카 파니차에게 바친다`(1917, 슈더트가르트 미술관)라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노을로 붉게 물들은 저녁 한 때에 이름 모를 큰 도시의 빌딩가에는 커다란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멀리보이는 건물에는 사람이 없음을 그 열린 창을 통해서 엿볼 수 있으며 가까이 있는 건물에는 각 방에 사람 같은 형상을 한 것, 짐승의 형상을 한 것,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의 형상 등이 보이고 또 건물과 건물 사이의 도로에는 사람의 형태를 가춘 것, 사람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한 형태의 동물, 완전히 쥐의 형태를 한 것, 이상한 형상을 한 괴물 등이 마치 홍수 때 물이 밀려닥치듯이 거리를 완전히 메우고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십자가, 악기, 농기구 등을 들고 있으며 그들 사이사이에 해골이 춤을 추고 있는가 하면 검은 관을 운반하고 있다. 이 그림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의 장례식을 올리기 위해 먼저 죽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장면인 것 같다. 이것은 당시 누구나가 지녔던 전쟁에 대한 공포이고 악몽이다.
 그로츠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오스카 파니차라는 정신과 의사 겸 문학가가 있었는데 그가 쓴 글이 반국가적이며 반도덕적이라 해서 그의 작품은 빈번하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되자 발광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그 곳에서 사망한 인물이다. 그런데 오스카는 그로츠가 그린 이 그림에 심취해 좋아했기 때문에 그로츠는 이 그림을 오스카 피니차에게 바친다는 제목을 추가 하였던 것이다.
 그로츠는 1차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는 다다이즘(Dadaism) 운동에 참여하면서 혼란한 세태와 부정부패, 전쟁의 비참함과 궁핍 등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뛰어난 묘사로 신랄하게 풍자 하였는데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는 것이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문국진 박사 약력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과학부 회장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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