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징만 잘 꼬집어 캐리커처 보는 듯


"너무 앞섰다" 거절당하기도…보나르·아르누보 한 예술장르 확립에 밑거름


환락가 감동적으로 표현한 첫작품 "물랭루주"
포스터, 시민들이 몰래 떼어갈 정도로 인기



"물랭루주: 라 귈리"(1891)
알비, 툴르즈 로트렉 미술관



 프랑스의 화가 로트렉(Toulouse Lautrec 1864~1901)은 스페인 국경 근처인 남 프랑스 알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방의 영주를 지낸 귀족 가문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혈족간 결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사촌 남매간이었지만 결혼하게 됐다.

 근친혼 탓이었는지 로트렉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허약했으며 10세경부터는 편두통과 하지 피로감이 생기기 시작, 13세 때는 의자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좌측 대퇴골 골절을 입었다.

치료 후 골절됐던 다리가 나을 무렵인 14세 때 다시 쓰러져 이번에는 우측 대퇴골 골절을 입게 된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좌우 대퇴골 골절로 인해 그의 신장은 성장을 멈춘 상태로 150센티 이상 자라지 않는 난쟁이가 되었던 것이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그를 평생 우울하게 만들어 산고 모자에 코걸이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밤마다 파리 뒷골목 술집 한 구석에 자리하고 눈에 보이는 현장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내면을 관적인 기능으로 볼 수 있었고 이를 재빨리 그림으로 옮기곤 했다.

이렇게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파리의 밤 풍경을 그리는 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작업장이자 생활의 터전이었다.

 당시 몽마르트 언덕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집과 댄스홀, 카바레가 들어섰다. 시민들은 유흥가로 변모한 몽마르트로 몰려들어 흥겨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렇게 술집 간 경쟁이 심해지자 붉은 풍차란 뜻을 지닌 카바레 "물랭루주"에서 선전 포스터를 로트렉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로트렉은 석판화로 포스터를 그리게 되었고 그것이 첫 작품 "물랭루주: 라 귈리(1891)"였다.

 포스터가 파리 시내에 붙여지자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며 사람들은 포스터를 몰래 떼어갔다.

 포스터 중앙에 등장하는 라 귈리라는 무용수는 별로 예쁘진 않았지만 춤 솜씨가 대단해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라 귈리라는 댄서는 춤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내로라하는 댄서들을 모두 젖히고 단숨에 춤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다. 여러 명의 댄서가 도전장을 냈으나 모두 허사였으며 누구도 그녀의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브뤼앙의 암바사되르 공연"(1892)
알비, 툴르즈 로트렉 미술관




로트렉도 물랭루주에 자주 출입하며 라 귈리의 춤에 매혹되었고, 그녀를 모델로 포스터를 그렸다. 포스터를 보면 마치 그녀의 신들린 듯 춤추는 장면을 보는 듯하며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관객들의 환호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즉 로트렉의 대담한 구도와 독창적인 기법으로 당시 환락가의 정경을 감동적으로 표현해 많은 화제와 호응을 얻었다.
 로트렉의 이러한 포스터 판화는 유화에서는 볼 수 없는 담백하면서도 신선한 색채, 평면성의 대담한 강조, 단순명료한 선묘와 진취적 구성으로 판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렇듯 로트렉의 선전포스터가 파리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업소가 번창하자 몽마르트 업소만이 아니라 파리 시내 유수한 접객업소들은 앞다퉈 로트렉에게 선전포스터를 주문하였다.

 로트렉이 이렇게 파리의 밤거리의 화가로서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자 고향의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놈이라고 노발대발 하였다. 그리고는 로트렉이라는 가문의 성을 그가 그리는 포스터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Lautrac 대신 성의 중간을 따서 Traclau라는 사인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사인을 본 동료화가들과 팬들은 왜 그런 사인을 쓰는가 궁금해하자 일일이 답하기 곤란해 다시 Lautrac이라는 사인을 쓰기 시작했다.

 로트렉이 저녁마다 찾아간 카바레 "미르리통"에서는 당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가수 브뤼앙(aristide Bruant)이 노래를 불었다. 로트렉은 브뤼앙이 부르는 노래를 매우 즐겼다.

 브뤼앙은 입이 거칠었지만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거친 얼굴 아래로 섬세한 감성을 감추고 있었다. 로트렉은 브뤼앙에게서 자기 자신의 일부를 보았다. 즉 로트렉도 브뤼앙처럼 아이러니와 익살, 냉소아래 상처받은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급격히 친한 친구가 되었다.

 브뤼앙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도 로트렉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노래를 멈추고는 "여러분 여기 위대한 화가이신 툴루즈 로트렉이 오셨군요"라고 소리 지르면 로트렉은 고개를 들고 술 마시는 손님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는 이제 자신의 위엄이나 진정한 고귀함이 화가라는 사실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의 작업이야말로 명예회복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마치 형제나 다름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트렉은 카바레 업주로부터 브뤼앙의 선전포스터를 그려줄 것을 주문 받았다.

 로트렉은 머리를 짜내고 있는 재주를 다부려 "브뤼앙의 암바사되르 공연(1892)"이라는 포스터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의뢰주는 너무 앞선 형식이라며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다른 화가에게 포스터 제작을 의뢰하려 했다.


"아리스티드 브뤼앙"(1893)
알비, 툴르즈 로트렉 미술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브뤼앙은 업주에게 만일 로트렉의 포스터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는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업주는 하는 수 없이 로트렉의 포스터를 받아들여 시내에 부치기로 하였다.

 먼저 그린 "물랭루주: 라 귈리"의 포스터에 비해 이번에 그린 포스터가 그리 앞선 형식의 그림이 아닌데 이를 거절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로트렉의 가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이면에는 로트렉의 사인이 아버지가 지시한 대로 지키지 않고 다시 Lautrac이라는 사인을 쓰는 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브뤼앙의 덕택으로 자기가 그린 포스터가 받아들여진 것을 고맙게 생각한 로트렉은 이번에는 너무 앞섰다는 평을 받지 않게 점잖게 그의 포스터 "아리스티드 브뤼앙(1893)"을 만들었으며 사인도 T-L을 둥근 ○속에 넣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상업적 선전 매체였던 포스터도 석판화로 만들게 되자 포스터를 예술의 영역에까지 끌어올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로트렉의 노력으로 "물랭루주: 라 귈리"의 포스터를 작성한 이래 브뤼앙이나 메이 밀톤, 잔아브릴 등 예인들의 포스터를 차례로 세상에 내놓은 덕분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 포스터들은 극장 앞과 길거리에 붙여져 예술을 미술관이나 전람회장에서 해방시켜 대중의 손이 닿는 곳에까지 가져오는 큰 공적을 이룩하였다.

 그와 동시에 석판화라는 수단의 제약과 강렬한 인상을 주려는 목적 때문에 선명한 색상 표현과 때로는 캐리커처와도 같은 대담한 형태 파악으로 조형적인 면에서도 20세기를 예고하는 듯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포스터 예술은 그 후 나비파의 보나르나 아르누보의 예술가들에 의해 확실하게 예술의 한 장르로써 확립됐는데 그 밑거름은 로트렉의 석판화 포스터가 닦은 셈이다.
저작권자 © 메디칼업저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