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교육학회 공동기획
의학교육 패러다임


백 상 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전 국시원장



의료환경 변화 속도보다 앞선 교육을
새로운 패러다임 인식·과감한 투자로 문제 풀어야

 우리나라 의학교육은 해가 다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모두가 새로운 의학교육 변화 추세에 알맞은 새 패러다임에 적응해 가기 위한 노력이다. 이번 특집에 실린 다른 내용들도 모두 그런 새로운 변화의 방향이거나 기대하는 바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교육에 아직도 문제점은 많다. 어림으로 꼽아보더라도 풀어야 할 문제점이 이미 개선된 것보다 월등히 많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점이 많아도 일일이 그것을 영역별로 나열하기에는 성격상 맞지 않는다. 이 기획을 한 메디칼 업저버도 그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문제점을 포괄적으로 다루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층이 얕다. 우리나라에는 41개 의과대학 또는 의학전문대학원이 있다. 거기에 줄잡아 9천여명(전임교원)의 교수가 있다. 대학마다 부여된 일의 시간과 비중이 다르긴 하나 모두 교육, 연구, 진료의 세 가지를 기본 임무로 하고 있다. 연구교수나 진료교수로 지정된 사람 외에는 모두 학생들과 접촉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교육에 제공하는지는 사람마다 전공 분야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평준화해서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1년 중 단 한 시간을 학생과 접촉한다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현장에 있는 교육자로서 가져야 할 인식, 생각, 방법, 태도는 확실해야 한다.

 교수는 예전부터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수는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 즉 일방적인 정보전달자의 역할로 인식되어 왔으나 지금은 달라졌다. 내가 직접 가르치는 일(강의)은 선생이 하는 일의 극히 일부이고 교육자로서는 적어도 여나문 가지의 다양한 임무를 새로운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단 한 시간의 강의나 임상실습을 담당하더라도 맡은 시간의 목표, 전략, 편성, 내용, 방법, 평가 등을 학생중심으로 맞추어 활용하기를 새로운 패러다임은 요구하고 있고 가르치는 사람은 그럴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 방식대로, 옛날부터 익숙하게 해오던 방법대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면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PBL을 개발한 Barrows 교수는 오래 전부터 선생들에게 이런 것을 강조해 왔다. "내가 얼마나 가르쳤느냐보다 학생이 얼마나 배웠는가를 늘 생각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학생들은 배우는 선생의 장단점을 의식 못하는 가운데 모방하게 된다. 사표가 되려면 가르치는 의학 내용도 중요하지만 교육자로의 모델로서도 본받게 해야 한다. 의과대학 선생들은 제도상 진료나 연구에 관한 선행 교육은 받아왔으나 교육에 관한한 무자격자로 시작한다. 그래서 지난 20세기 동안 의학은 많은 문제점과 혼란, 질책, 갈등을 빚어왔다. 교수들도 반성하고 대학도 자숙하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 지난 세기의 중간쯤부터였다. 이래서 못했고 저래서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그 후 많은 이론과 방법이 개발되고 이제는 전 세계 의학교육에서 보편적으로 활용하여 훌륭한 의사를 키워내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가는 첫 단계가 되었다.

 의과대학 교육의 질과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평가하는 대학평가인증 기준에서도 그렇고 의사국가시험에서도 새로운 변화 추세에 따라 가르치는 시스템을 바꾸고 실천하고 평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교육의 중요한 책임을 맡게 되면 이런 분위기와 인식을 빠르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임기를 마치고 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십중팔구이다. 이것은 근본 취지가 임기 중 보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이지 교육자로서 이런 세계를 경험했으니 계속 이것을 활용하고 후배 교수에게도 경험할 기회를 더욱 권유하려는 계기로 삼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제는 옳은 방법으로 올바른 태도를 지닌 의사를 교육시켜 사회에 내보내는 일이 의과대학 교수의 당연한 책무로 생각하고 의학교육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개인적인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노력하는 교수도 많아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실천하는 교수 층이 너무 얕다. 그것은 전체 교수 수와 의학교육 학회 회원 수를 비교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의학교육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졌지만 일찍이 눈을 떠서 그 뒤로는 비록 변화 속도는 느리지만 꾸준히 새로운 이론과 방법의 학습, 연구를 통해 이것을 도입하고 실천하는 모범적인 나라 중 하나이다. 약 30년 사이에 달라진 현상이다. 특히 교육 방법에서는 극단적인 양면이 아직도 팽팽하게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가 바뀌어 가고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동참하려는 교수 층이 아직은 두껍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로운 변화 추세를 공감하고 동참하여 대학마다 성숙도가 높은 의학교육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이들만의 한정된 노력으로는 너무 힘도 들고 걸림돌도 많다. 새로 임명되는 신임 교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추가적 연수의 경험을 처음부터 가지고 교육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교실이나 과에 돌아가서는 완고한 선배의 전통적인 사고를 가진 위압감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들이 교수가 될 때까지 몇 십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선배의 인식이 바뀌도록 대학이 노력을 해야 하는가?

 둘째, 의학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이 좀더 과감해야 한다. 지금부터 40, 50년 전에는 나라 전체 살림이 가난하기도 했지만 문교부(당시)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받는 1년 단위 연구비가 고작 200만원 정도였다. 이것을 가지고 그래도 그 당시 교수는 열심히 그 수준에 맞추어 연구해서 학술지에 보고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지에 많은 우수 논문이 오르게 된 데는 연구비의 투자가 큰 몫을 했다.

 지금은 연구비 1억 원은 옛날 200만 원쯤에나 해당되고 몇 십억원의 연구비를 해마다 운영하면서 세계와 경쟁하는 교수가 많다.

 의학교육도 바로 그런 경험을 살려 이제는 투자도 하고 인재도 키워내야 한다. 최근 몇 해 사이에 많은 대학이 의학교육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소집단교육이나 임상수기 훈련을 위한 시설투자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교육에도 큰 공헌을 하고 대학평가기준에도 부합하며 장차 국가시험을 준비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 단계 차원 높은 수준으로 대학을 끌어 올리는데 투자를 할 때가 왔다. 대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이자 아이디어뱅크가 되는 것은 인적 자원이다. 시설과 설비는 예산만 있으면 단시간 내에 변화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의학교육에 전문성 있는 사람 자원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한다. 대학도 체계적으로 이런 측면에 눈을 뜨고 인력을 양성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의학전공 분야에 투자하는 상당 부분을 이제는 그리로 돌려야 하는데 어느 대학이 이것을 앞서서 시행할 것인지 걱정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알맞은 변화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바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절차(과정)또한 이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의학교육의 변화 프로토콜을 개발하는 일은 주제와 내용이 다를 뿐이지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일과 매우 흡사하다. 검증된 매력 있는 방법과 이론을 모방하는 것은 좋으나 절차는 논리적인 연구 단계를 갖추어야 바탕이 탄탄하고 허점이 적어진다.

 의학교육 전체 틀의 reform, 커리큘럼의 부분 개선, 어느 특정 프로그램의 특정 개념과 방법 도입 등은 대학마다 규모가 다르고 선호도가 다르다. 따라서 다른 대학에서 괜찮다고 하는 것을 이것저것 모아오면 미안한 표현이지만 누더기가 되기 쉽다. 왜 그것을 적용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단계적으로 명백히 기술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교육 변화의 알맹이만 가져 왔지 준비와 적용과 효과에 대한 절차 프로토콜을 잘 지키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의학교육도 변화를 가져오려면 실험실 연구를 시작하듯이 그에 대한 action research가 필요하다. 이 의학교육 연구는 논리의 개발이나 이론을 정립하려는 일반 연구 목적과 달리 응용을 위한 applied research이어야 한다. 이것은 대학 현장의 상황 속에서 실시간으로 단계적 적용에 바탕을 두어야 하므로 반드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전 단계의 분석이 완료되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것을 체계적으로 장기간 시행하는 인력이 키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약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전 세계 의학교육 전문가로 10여 명으로 하여금 "Developing protocols for change in medical education"을 개발해낸 바 있다.

 시작할 단계의 절차, 초기 적용 단계, 마지막 적용 단계 등 각 항목마다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를 적게는 4 steps, 많게는 11 steps를 명백히 목적과 임무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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