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 때부터 차곡차곡…생애 전주기 걸쳐 건강 뒤흔들어

[메디칼업저버 박선혜 기자] 플라스틱 용기, 영수증 등 일상생활에서 먹고 만지고 입으면서 몸안에 쌓인 내분비 교란물질(endocrine disrupting chemicals)이 생애 전반에 걸쳐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내분비 교란물질은 체내에서 내분비계 정상 기능을 방해하거나 혼란시켜 여러 질환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국내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발암물질 생리대 등 사건이 발생하면서 내분비 교란물질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앞서 1996년 미국 동물학박사 Theo Colborn은 저서 '도둑 맞은 미래(Our Stolen Future)'에서 '환경성 내분비 교란물질이 야생동물과 인류의 생식, 면역, 그리고 정신 기능의 장애와 교란을 유발할 수 있는 주범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내분비 교란물질의 심각성을 알렸다. 

이에 전 세계적으로 내분비 교란물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한 세포실험, 동물실험, 역학연구 등이 진행 중이다. 여기에 정부와 과학자들뿐 아니라 의료진도 힘을 보태고 있다.

창간 18주년 특집호에서는 역학연구를 근거로 내분비 교란물질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건강 문제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구 방향 등을 짚어봤다.

[창간 18주년 ①] 은밀한 침입자 '내분비 교란물질'에 미래를 도둑 맞다

[창간 18주년 ②] 내분비 교란물질, 태아기부터 성인기까지 만병 유발

[창간 18주년 ③] 범인을 색출하라 '엑스포솜' 연구로 수색범위 넓힌다

[창간 18주년 ④] "내분비 교란물질 독성 의심되면 정부 지침 바로 내놔야"

인간의 손으로 만든 내분비 교란물질 800여 종

내분비 교란물질은 동물이나 사람의 체내에 유입돼 내분비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거나 혼란시키는 화학물질이다. 마치 체내 호르몬처럼 작용해 환경호르몬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부분 인간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었다.

2012년 세계보건기구(WHO)와 환경보호기구(UNEP)가 발행한 책에서는 800여 종의 화학물질이 호르몬 수용체, 호르몬 합성 등을 방해할 수 있거나 의심되는 내분비 교란물질이라고 언급됐다. 

내분비 교란물질에는 다이옥신 등 독성이 강한 유기물질과 같이 자연계에서 파괴되지 않고 잔류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과 체내에서 쉽게 배출되는 비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인 프탈레이트류, 비스페놀류, 파라벤류 등이 있다. 이 중 프탈레이트류는 플라스틱을 부드럽게 만드는 화학성분으로 장난감, 가정용 바닥재 등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비스페놀류는 캔음료, 생수통, 영수증 용지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POPs에 속하는 물질은 31종으로 UN 결의에 의해 사용이 금지됐다. 비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의 경우 국내에서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에 의해 30여 종이 관리되고 있으나, 142종을 관리하는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리 대상이 적다. 

내분비 교란물질은 인간의 호르몬계에 영향을 미쳐 질병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생식기능 저하와 기형, 성장장애 등을 유발해 생물계의 존속까지 위협할 수 있다. 

이에 미국내분비학회(Endocrine Society)는 2009년 내분비 교란물질 관련 첫 성명을 발표, 내분비 교란물질이 생식기 발달뿐 아니라 암, 비만, 당뇨병, 심혈관질환 등 발병과 관련있다고 경고했다(Endocr Rev 2009;30(4):293-342). 
내분비 교란물질, 태반 통과해 태아에도 영향

전문가들은 생애주기 중 내분비 교란물질에 가장 예민한 시기로 태아기와 영유아기를 꼽는다. 이 시기에 노출된 내분비 교란물질은 성적 발달, 대사질환 등에 영향을 주며 그 문제가 성인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국내에서는 산모로부터 생체 시료를 수집해 환경오염 노출과 질환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한 '산모·영유아의 환경유해인자 노출 및 건강영향 연구(MOCEH)'가 2006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2006~2010년 서울, 천안, 울산 등 세  지역에서 산모 모집(1751명)과 출생아 추적관찰이 함께 이뤄졌으며, 2011년부터는 출생아 추적관찰을 시행하고 있다. 

MOCEH 연구를 이끄는 이대목동병원 하은희 교수(직업환경의학과)는 지난달 열린 '내분비교란물질연구회 심포지엄'에서 "MOCEH 연구는 산모 시기에 노출된 요인들이 태아기와 출생 후 건강에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기 위해 진행 중인 연구"라며 "한 번 노출되면 체내에 장기간 쌓이는 브롬화난연제(PBDE) 등 물질뿐 아니라 비스페놀류도 태반을 통과해 위험하다. 즉 산모가 이러한 내분비 교란물질에 노출된다면, 그 물질들이 태반을 통과해 태아에게 전달돼 태내 건강과 출생 후 그리고 성인이 됐을 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신 중 노출 시 신생아 성장·인지발달에 영향

MOCEH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임신 중 노출된 비스페놀 A가 신생아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MOCEH 연구에 참여한 산모 757명을 대상으로 임신 초기·중기·후기의 요중 비스페놀 A 농도와 신생아 체중, 신장, 폰데랄 지수(Ponderal index)의 연관성을 평가한 결과, 임신 초기와 비교해 중기에 비스페놀 A에 노출되면 신생아의 출생 체중이 의미 있게 증가했다. 

이 같은 결과는 남아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고, 임신 중 비스페놀 A 노출과 폰데랄 지수의 연관성은 여아에서 두드러졌다(Int J Hyg Environ Health 2014;217(2-3):328-334). 하지만 비스페놀 A가 태내 및 출생 후 성장에 어떤 기전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2018년 MOCEH 연구에 참여한 산모와 신생아 366쌍을 분석한 결과, 임신 후기 비스페놀 A 농도가 증가하면 초음파 검사로 평가한 태아의 대퇴골 길이(femur length)는 감소했다. 그러나 출생 후 72개월까지는 비스페놀 A 농도가 상승할수록 길이별 체중(weight for length)이 증가하는 양의 상관관계가 나타났다(Sci Total Environ 2018;612:1433-1441). 

역학연구에서 출생 전후 성장과 비스페놀 A 농도의 연관성이 다른 양상을 보였기에 향후 그 이유를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기전 관련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하 교수의 전언이다. 

이와 함께 임신 중 프탈레이트, 중금속, POPs 등의 노출이 늘면 영아기 발달이 저해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산모의 소변, 전혈, 혈청, 모유 등에서 프탈레이트, 중금속, POPs 농도를 확인하고 13~24개월 된 영아(140명)의 신경발달점수와의 연관성을 평가한 결과, 수은, 비스페놀 A, 프탈레이트 노출 수준이 높을수록 지능발달지수(MDI)가 낮았다. 게다가 납, 프탈레이트 농도가 높으면 운동발달지수(PDI)가 감소하는 역상관관계가 나타났다(Sci Total Environ 2018;624:377-384).

이 같은 연구 결과를 근거로 향후 내분비 교란물질에 장기간 노출됐을 때 건강 문제를 추적관찰한 대규모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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