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접한 검도 지금까지 취미로…국내 의사검도회 만들고 일본 의사회와도 교류
대영박물관서 미라 보자마자 전율…복중 태아 간직한 파평 윤씨 미라 연구
남극에 연락했더니 북극서 연락…한국 돌아와 극지의학연구회 조직

고려대구로병원 병리과 김한겸 교수ⓒ메디칼업저버 김민수 기자
고려대구로병원 병리과 김한겸 교수ⓒ메디칼업저버 김민수 기자

[메디칼업저버 박선재 기자] 세상을 향한 풍부한 호기심. 그것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인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고대 구로병원 김한겸 교수(병리과)도 그런 사람인 듯했다. 

창간 18주년 특집호를 준비하기 위해 김 교수를 만나려 했던 애초 목적은 극지의학연구회 취재를 위해서였다. 7월 더운 여름에 발행되는 특집호 신문이라 열기도 식힐 겸, 남극이나 북극이 주는 알 수 없는 매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아 본래 목적을 이루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지의학은 그를 구성하는 한 편린일 뿐, 그는 또 다른 세상을 그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구나 할 정도로 그는 검도, 미라 부검, 사진 등 공통점이라곤 찾기 어려운 각기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몇 번은 더 인터뷰를 진행해도 좋을 만큼 그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진 병리학 교수다. 그래서 최근 일본 의사들과 교류를 시작한 검도 얘기부터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자세에 반해 시작한 검도, 의사검도회 조직까지

그가 검도를 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가정교사를 하던 형의 손을 잡고 성균관대 도장에 갔다가 검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때 시작한 검도를 그는 지금도 하고 있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폼을 갖춘 자세에 매력을 느꼈다고. 

의사가 되고 검도 6단을 딴 후 의사검도회를 조직했다. 그때가 2000년. 의사검도회를 조직한 목적은 일본 의사검도회와 교류하고 세계의사검도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꿈은 오랫동안 꿈으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는 "일본 의사검도회와 교류하고 싶어 의사검도회를 만들었는데, 정작 일본 의사들을 만나지 못했다"며 "그런데 지난해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 오사카의학부 면역학부 교수를 만났다. 일본은 50주년 행사를 할 정도로 의사검도회가 활성화돼 있었다"고 말했다.

또 "올해 15명의 검도의사회 회원들과 일본을 다녀왔고, 내년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 의사검도회 회원들과 교류를 약속했다"고 사람 좋게 웃었다.

과거에서 온 메신저, 미라 

이야기는 검도에서 미라로 내달린다. 과거에서 온 메신저라 불리는 미라 연구에서도 그는 실력을 인정받는 전문가다.  
미라와 만나게 된 것은 영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대영박물관 3층에서 만난 미라와의 짜릿한 만남 덕분. 병리학을 전공한 그에게 남다른 느낌으로 미라가 다가왔고, 그 후에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2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파평 윤씨' 미라가 그의 앞에 등장한다. 

그는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미라 한 구가 있는데 연구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파평 윤씨 미라였다"라며 "산모가 출산하려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로, 복중에 태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미라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라 연구에 대해서는 희망보다 안타까움이 크다고 했다. 현대 의학 발전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풀 수 있는 학문임에도 연구하는 사람이 적고, 현재 고려대가 보관하고 있는 8구의 미라도 그가 학교를 떠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라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화장(火葬) 문화에 여러 생각이 든다며 씁쓸해했다.

ⓒ메디칼업저버 김민수 기자
ⓒ메디칼업저버 김민수 기자

그는 "삶이 끝난 후 모두 태워버리면 미래에는 현재의 우리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고구려 무덤을 보면서 당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데,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또 다른 생각은 외국의 미라는 국내에 들여와 전시하는 등 요란을 떨면서, 정작 파평 윤씨 같은 세계적인 미라는 푸대접을 하는 게 뭔가 아이러니하다는 것이었다.

쇄빙선의 날카로운 추억…"남극에 가야겠다"

미라로 흘러간 얘기는 극지의학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는 지난 2000년 일본 쇄빙선을 박물관으로 쓰는 것을 본 후 남극이나 북극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45세였던 그는 이미 너무 늦은 나이라 극지연구소에서 거부당했다.

그렇게 남극에 가겠다는 꿈을 포기한 채 지내던 중 극지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극지연구소는 동결된 상태에서 조직을 얻는 연구를 하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 교수였던 것. 그렇게 그는 극지에 가는 꿈을 이룬 것이다.

그는 "2006년 4월 북극에 갔는데,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동안의 의료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치료 기반조차 없는 상태였다"며 "한국에 돌아와 극지에 가고 싶은 의사들을 모으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극지의학연구회다"라고 소개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극 세종기지와 장보고 기지, 북극 다산 기지를 가동하고 있다. 여기에 쇄빙선인 아라온호가 움직이고 있다. 4곳 모두에 의사가 필요하지만 의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경력단절 등의 문제로 관심은 많지만 지원할 수 있는 의사가 많지 않아서다. 

그는 "일본은 극지연구소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미미한 수준"이라며 "2013년 고려대 송진원 교수(미생물학교실)가 남극 도둑갈매기에서 신종 아데노바이러스를 발견했다. 앞으로 극지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극지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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